13세기 독일의 중세 시대. 궁정의 기사이자 음유시인인 탄호이저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금단의 장소인 ‘베누스베르크’ 즉, 비너스의 동산에 발길을 들여놓는다. 그곳은 밤낮을 모르고 인간의 육체적인 쾌락만을 탐닉하는 세계였다. 한동안 베누스베르크의 끈적이는 분위기에 한껏 취해 있던 탄호이저는 어느 날 극심한 권태를 느끼고는 다시금 밝은 지상의 세계로 돌아온다.
오스트리아 화가 가브리엘 폰 막스의 작품 <탄호이저>(1878년경)
오스트리아 화가 가브리엘 폰 막스의 작품 <탄호이저>(1878년경)
탄호이저는 원래 독일 중부 튀링엔 지방 바르트부르크 성의 이름난 음유시인이었다. 마침 그가 돌아온 때는 봄의 절정이요, 곧 이 지방의 영주 헤르만 백작이 음유시인들을 모아놓고 노래 경연대회를 개최할 즈음이었다. 영민한 지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뛰어난 시인이었던 탄호이저도 다시금 이 노래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아름다운 시가(詩歌)를 읊조릴 것을 다짐한다. 마침 그를 오랫동안 연모해 오던 영주의 조카 엘리자베트도 그의 우승을 애타게 바라고 있기도 했다.

음유시인들이 차례로 등장해 사랑을 테마로 노래를 부른다. 볼프람 폰 에센바흐,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 등 독일 중세에 실존했던 위대한 음유시인들이 오페라 속에 등장하여 그들의 시와 음악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들의 노래를 듣고 있던 탄호이저는 표정이 일그러진다. 예전 절친한 동료들의 노래 속에서 어떤 ‘기만’과 ‘허위’를 발견한 것이다.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진정한 사랑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탄호이저는 사랑이란 좀 더 로맨틱하고 애욕에 넘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금단의 세계인 베누스베르크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중세의 엄격한 가톨릭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점에서 탄호이저의 이러한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이단 행동이었다. 흥분한 기사들이 칼을 뽑아 들어 그를 위협하고, 영주 헤르만은 탄호이저에게 로마로 순례와 참회의 여행을 떠날 것을 엄숙하게 명한다.
영국 화가 존 콜리어의 작품 <베누스베르크에 있는 탄호이저>(1901)
영국 화가 존 콜리어의 작품 <베누스베르크에 있는 탄호이저>(1901)
계절이 바뀌고 가을이 지나 초겨울이 찾아온다. 로마로 떠났던 탄호이저가 돌아와 교황이 결국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절망적으로 토로한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자베트는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만다. 그때 기적 같은 구원의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탄호이저의 구원을 알리는 ‘순례자의 합창’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탄호이저> 3막의 무대 디자인(연도 미상) / ⓒArchivio Storico Ricordi
<탄호이저> 3막의 무대 디자인(연도 미상) / ⓒArchivio Storico Ricordi
바그너가 청년 시절에 쓴 <탄호이저>는 그의 음악극 세계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오페라는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지식인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베누스베르크가 상징하는 ‘육체적 사랑’과 엘리자베트가 표상하는 ‘정신적 사랑’ 사이의 대립이 가장 먼저 보인다. 그러나 심층적인 주제 의식은 이것보다 좀 더 복잡하다.

바그너는 작품 속에서 ‘진정한 독일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에 천착한다. 그에 의할 때 로마 가톨릭은 제도화된 정신이며 동시에 외래에서 전래되고 이식된 것이다. 오히려 베누스베르크의 동굴 속에서 독일 고유 신앙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신구 예술 사이의 대립’도 매우 중요한 테마다. 탄호이저의 동료들이 노래하는 예술은 온화하지만 새로울 것이 없는 낡은 예술이다. 반면 탄호이저의 신예술은 새롭지만 아직은 미숙하고 위험하다. 이 둘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 관계, 주류 예술가들의 비주류에 대한 탄압과 멸시, 새로운 예술 사조 탄생의 순간 등을 오페라는 바그너 특유의 관현악 필치로 극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오는 10월 중순 국립오페라단이 45년 만에 공연하는 이 문제작을 통해 가장 독일적인 오페라가 주는 심오한 감동의 세계로 깊이 빠져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지원 오페라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