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서울 문래동 철공소 밀집구역에 폐업한 업체들의 빛바랜 간판이 건물 외벽에 덩그러니 붙어있다. 영등포구는 이 일대 철공소 1000여 곳을 수도권 그린벨트로 통이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최해련 기자
19일 서울 문래동 철공소 밀집구역에 폐업한 업체들의 빛바랜 간판이 건물 외벽에 덩그러니 붙어있다. 영등포구는 이 일대 철공소 1000여 곳을 수도권 그린벨트로 통이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최해련 기자
“장사 잘되는 술집, 식당을 들이겠다며 계속 임대료를 올려달라는데 이제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입니다.”

19일 서울 문래동의 금속 가공 전문업체인 대룡정공사 작업장. 손에 쇳가루를 묻혀가며 부품을 깎던 정원석 대표는 “40여 년간 자리를 지켜왔지만 주변 철공소가 임차료 압박을 이기지 못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정 대표의 사업장이 있는 문래동2가는 이 일대 철공단지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원주민 내몰림)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곳으로 꼽힌다. 이 골목(도림로 131길)에만 과거 7~8개 공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대룡정공만이 홀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임대료 압박에 백기 든 장인들

치솟는 임대료에 밀려나는 철공소…1000곳 통째 옮겨 뿌리산업 살린다
60년 역사의 문래동 기계금속 집적지가 가파르게 오르는 임대료와 인력 부족에 소멸 위기에 놓였다. 1980년대 호황기 때만 해도 2500여 곳에 달하던 철공소가 현재 1260여 곳으로 반 토막 났다. 이곳에 철강소가 모여들기 시작한 건 경성방적 등 방적공장과 크라운, 오비맥주 등 대기업이 서울 서남권에 자리한 1960년대부터다. 이들 대기업이 필요로 하던 다양한 금속 부품을 생산했고, 을지로나 청계천에서 고치지 못하는 기계 수리도 이곳 장인들은 척척 해냈다. “한때 지나가던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정 대표는 회상했다.

그러나 이제는 산업 역군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열악한 환경 탓에 소중한 기술을 전수할 인력은 유입되지 않고 인근 아파트 주민에게 ‘혐오시설’ 취급만 받는다. 견디다 못한 고령의 철공소 사장들이 이주 및 폐업을 선택했고 그 빈자리를 ‘핫플’(핫플레이스)이 채웠다. 최근 4~5년간 이곳에서 개업한 카페, 술집 등이 260곳에 이른다.

그럼에도 이곳은 여전히 국내 제조업의 뿌리 역할을 맡고 있다. 금속 가공에 필요한 금형, 선반, 절삭, 보링, 열처리, 그라인딩, 후처리, 용접, 도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정이 한곳에서 이뤄진다.

이런 생태계가 지난 수년간 지속돼온 젠트리피케이션 탓에 흔들리고 있다. 관련 공장이 빠져나가 작업 효율이 떨어지면서 발주처에 납기일을 미뤄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장인이 늘고 있다. 한 철공소 대표는 “길 건너 있던 도금 공장이 사라져 서너 시간 안에 끝낼 후작업이 이제 하루 이상 걸린다”고 토로했다.

이대로 방치하면 우리나라 제조업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한부영 부영메탈 대표는 “문래동 철공단지가 사라지면 나중에는 간단한 기계부품 하나 깎으려고 해도 중국을 가야 하는 등 엄청난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도권 그린벨트로 통이전 추진

영등포구는 문래동 철공단지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도 기존 도심 공간을 새롭게 되살리는 유일한 대안이 ‘통이전’이라고 보고 있다. 수도권 그린벨트 지역에 최소 30만㎡ 용지를 확보해 이전을 희망하는 1000여 곳을 한꺼번에 이주시킨다는 구상이다. 이전 후보지로는 서울 외곽, 경기 김포·시흥·안산시 등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장뿐 아니라 연구개발(R&D) 단지, 업무지원시설, 근로자 숙소 및 편의시설 등도 함께 조성될 예정이다. 이에 따른 이전 비용은 총 2000억~3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이전에 따른 경제 효과도 기대된다. 직접 고용 일자리만 약 3600개 창출되고, 뿌리기업 1000여 곳이 신규 유입되는 등 연간 생산액 증대 효과만 1조2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영등포구 관계자는 “기초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관심을 두는 곳이 적지 않다”며 “경쟁 입찰을 통한 후보지 선정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