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떨어져서 보면 인생극장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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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소연의 탐나는 책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맥베스>를 인용하며 얻는 것
<맥베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맥베스>를 인용하며 얻는 것
고령 바이든의 하차 앞두고 ‘맥베스’ 소환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앞두고 2024년 7월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대중 연설에서 보였던 건강 문제와 말실수 등으로 대선 레이스를 소화하기 어렵다는 우려와 비난이 빗발쳤다. 한동안 버티던 바이든은 결국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다. 미국 역사상 56년 만에 일어난 무거운 결단이었다.
그 와중에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가 현지 언론에서 여러 차례 인용되었다. 역성혁명으로 왕좌에 오른 맥베스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공포정치를 펼치고 정적을 살해한다. 그는 잠시동안 천하를 누렸으나 또 다른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맥베스>의 대사처럼 피는 피를 불러들였다. 여기서 바이든만 연극 속 인물에 비유된 게 아니었다. 맥베스의 곁에서 야욕을 부추기던 맥베스 부인의 자리에, 영부인인 질 바이든도 꿰맞춰졌다.
그렇다고 어떻게 17세기 영국의 이야기가 현재 미국의 상황과 딱 들어맞겠는가? 셰익스피어 고전과 달리 “왕관”을 내려놓은 바이든은 죽음의 순간을 군인처럼 품위 있게 받아들인 코도 영주로 우아하게 묘사되었다. (극 초반에 쿠데타를 일으킨 코도 영주를 물리친 이가 당시의 맥베스 장군이었다.)
비유와 패러디는 한정된 정보로 깊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문해력’ 보유자들 사이에 연대감도 자아낸다. 풍자와 패러디로 인기가 있는 <SNL 코리아>는 최근 뮤지컬 <시카고>에서 유명한 복화술 장면을 패러디했다. 지금은 비록 휴대폰 화면이라도 대중에게 익숙하다는 것이다. 패러디는 원본을 알지 못하면 어필이 되지 않으니.
현실을 분석하는 기사를 쓸 때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비유로 들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역사를 미리 끌어 쓰는 효과다. 현시점은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그걸 묘사하는 사람의 시각으로 뒤틀어진다. 자기 글을 사흘은 지나야 얼마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듯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역사로 복원할 때는 제3의 시각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로 빗대다 보면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다. 끓는 피가 가라앉는다. 맥베스가 처음부터 야욕에 불타는 인간은 아니었다. 마녀들의 예언이 뭐라고, 아내의 부추김에 맥베스의 권력 욕구는 점차 자라난다. 그게 맥베스의 일뿐이겠는가. 우리는 남의 얘기를 통해 인간에게는 윤리만 있는 게 아니라 이기적이고 어두운 구석이 있다고 항복한다.
미국 말고 우리가 끌어올 수 있는 이야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단한 권력을 지닌 인물도 결국 인간성으로 고뇌하며 미끄러질 수 있고, 어쩌면 회복할 수 있다는 희비극으로 무엇이 있을까? 고전은 영국만의, 중국만의 고전은 아니고 그래서 인류의 유산이라 부르는 걸까?
희곡을 소설처럼 재밌게 감상하는 법 <맥베스>는 소설처럼 묘사되지 않고 대사로만 진행되어 나 같은 산문 독자에게 익숙지 않다. 또 희곡은 시처럼 입으로 읽는 즐거움도 크기 때문에 아무리 잘된 번역도 원문에 다가서기 어려운 것 같다. 이래서 원문을 암기하며 셰익스피어의 진가를 알아보라고, 대학 때 <햄릿> 수업에서 빈칸 채우기 시험을 보았던 걸까? 그때는 진저리를 쳤는데 이제는 “Blood will have blood.”를 외워보고 싶다.
나는 <맥베스>를 이렇게 보았다. 덴젤 워싱턴과 프랜시스 맥도맨드가 주연한 영화 <맥베스의 비극 The Tragedy of Macbeth>(2021)은 연극이 아닌 영화라서 대사 전달의 제약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읊조리는 말들이 뇌 속 복잡한 의식이 스며 나오는 것 같아 훨씬 더 몰입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시적 감수성을 고려한 우리말 번역본을 이따금 대조해보니 괜찮은 감상법 같다. 독해가 수월한 현대식 영어 판본도 찾아볼 만하다.
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앞두고 2024년 7월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대중 연설에서 보였던 건강 문제와 말실수 등으로 대선 레이스를 소화하기 어렵다는 우려와 비난이 빗발쳤다. 한동안 버티던 바이든은 결국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다. 미국 역사상 56년 만에 일어난 무거운 결단이었다.
그 와중에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가 현지 언론에서 여러 차례 인용되었다. 역성혁명으로 왕좌에 오른 맥베스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공포정치를 펼치고 정적을 살해한다. 그는 잠시동안 천하를 누렸으나 또 다른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맥베스>의 대사처럼 피는 피를 불러들였다. 여기서 바이든만 연극 속 인물에 비유된 게 아니었다. 맥베스의 곁에서 야욕을 부추기던 맥베스 부인의 자리에, 영부인인 질 바이든도 꿰맞춰졌다.
그렇다고 어떻게 17세기 영국의 이야기가 현재 미국의 상황과 딱 들어맞겠는가? 셰익스피어 고전과 달리 “왕관”을 내려놓은 바이든은 죽음의 순간을 군인처럼 품위 있게 받아들인 코도 영주로 우아하게 묘사되었다. (극 초반에 쿠데타를 일으킨 코도 영주를 물리친 이가 당시의 맥베스 장군이었다.)
살아생전 어떤 일보다이야기에 빗대면 복합적으로 바라보게 돼
떠날 때가 가장 어울렸다고요. 그는 죽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숙련된 사람처럼
자신이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별볼일 없는 잡동사니처럼 내팽개쳤습니다.
Nothing in his life
Became him like the leaving it; he died
As one that had been studied in his death,
To throw away the dearest thing he owed,
As 'twere a careless trifle.
- <맥베스> 1막 4장
비유와 패러디는 한정된 정보로 깊은 정보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문해력’ 보유자들 사이에 연대감도 자아낸다. 풍자와 패러디로 인기가 있는 <SNL 코리아>는 최근 뮤지컬 <시카고>에서 유명한 복화술 장면을 패러디했다. 지금은 비록 휴대폰 화면이라도 대중에게 익숙하다는 것이다. 패러디는 원본을 알지 못하면 어필이 되지 않으니.
현실을 분석하는 기사를 쓸 때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를 비유로 들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역사를 미리 끌어 쓰는 효과다. 현시점은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그걸 묘사하는 사람의 시각으로 뒤틀어진다. 자기 글을 사흘은 지나야 얼마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듯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역사로 복원할 때는 제3의 시각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로 빗대다 보면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다. 끓는 피가 가라앉는다. 맥베스가 처음부터 야욕에 불타는 인간은 아니었다. 마녀들의 예언이 뭐라고, 아내의 부추김에 맥베스의 권력 욕구는 점차 자라난다. 그게 맥베스의 일뿐이겠는가. 우리는 남의 얘기를 통해 인간에게는 윤리만 있는 게 아니라 이기적이고 어두운 구석이 있다고 항복한다.
미국 말고 우리가 끌어올 수 있는 이야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단한 권력을 지닌 인물도 결국 인간성으로 고뇌하며 미끄러질 수 있고, 어쩌면 회복할 수 있다는 희비극으로 무엇이 있을까? 고전은 영국만의, 중국만의 고전은 아니고 그래서 인류의 유산이라 부르는 걸까?
희곡을 소설처럼 재밌게 감상하는 법 <맥베스>는 소설처럼 묘사되지 않고 대사로만 진행되어 나 같은 산문 독자에게 익숙지 않다. 또 희곡은 시처럼 입으로 읽는 즐거움도 크기 때문에 아무리 잘된 번역도 원문에 다가서기 어려운 것 같다. 이래서 원문을 암기하며 셰익스피어의 진가를 알아보라고, 대학 때 <햄릿> 수업에서 빈칸 채우기 시험을 보았던 걸까? 그때는 진저리를 쳤는데 이제는 “Blood will have blood.”를 외워보고 싶다.
나는 <맥베스>를 이렇게 보았다. 덴젤 워싱턴과 프랜시스 맥도맨드가 주연한 영화 <맥베스의 비극 The Tragedy of Macbeth>(2021)은 연극이 아닌 영화라서 대사 전달의 제약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읊조리는 말들이 뇌 속 복잡한 의식이 스며 나오는 것 같아 훨씬 더 몰입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시적 감수성을 고려한 우리말 번역본을 이따금 대조해보니 괜찮은 감상법 같다. 독해가 수월한 현대식 영어 판본도 찾아볼 만하다.
정소연 세종서적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