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카 천지의 세상에서, 천경자 장욱진 고흐 같은 이름을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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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에 비친 거울 속 자화상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에 비친 거울 속 자화상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자화상이나 초상화를 그리지 않습니다. 셀피(Selfie, 자기 자신(Self)과 지소형 명사 접미사(ie)를 조합한 신조어로 한국에서는 셀프카메라를 줄여 ‘셀카’라고 부릅니다)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비를 한 개 이상 지니고 다니는 시대에 ‘셀피’는 세대와 국가를 초월하는 문화 현상이 됐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요청이 아니고는 좀처럼 셀피를 촬영하지 않는 아저씨입니다만 자신의 정체성을 한껏 드러내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이 움직임에 대해 특별한 거부감은 없습니다. 자화상과 거울을 향한 상념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스스로 거울이 된 사람
옛 정취를 간직한 서울 정동길 중간의 회전교차로를 지나 서울시립미술관의 상설전시관에 가면 언제든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천경자 화백의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작품 속에서 다양한 여인을 그려냈는데, 사실상 작가 스스로를 투영했다고 여러 차례 말했으니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며 자화상을 보는 것처럼 느끼곤 합니다. ‘거울’과 ‘자화상’이라는 이미지를 추구했던 천경자 화백은 이름에도 거울이 들어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작품 하단의 서명 가운데 글자 ‘경(鏡)’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름에 거울이 들어 있다니’ 하고 말입니다. 양가(兩家) 어머니와 아내의 이름에도 ‘경’이 포함되지만, 그 뜻이 거울인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천옥자(千玉子)’라는 이름을 선생이 스스로 바꿔 ‘천경자(千鏡子)’가 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거울이 된 천경자 화백 외에도 우리가 잘 아는 예술가들은 참 자화상을 즐겨 그렸습니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에는 물론이고, 기술 발전이 이뤄져 실물보다 더 실물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얻게 된 이후에도 일부로 애써 자화상을 그리거나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기 때문이죠.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
경기도 양주에도 자화상으로 유명한 예술가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있습니다. 장욱진 화백을 기리는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입니다. 장욱진 화백은 ‘길 위의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피란길에 그려졌다는 이 작품에는 전쟁의 폭력성이나 아픔 대신 목가적 풍경 속에서 유유히 걷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작품을 향한 해석이 다양해 무엇이 정확한 의도인지 쉽게 알 수 없지만, 그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자화상이니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화상을 그린 화가’라고 하면 자연스레 장욱진 화백을 떠올리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수십 개의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형을 아꼈던 동생 테오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 위대한 이름을 그대로 부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동어반복(同語反復)된 것처럼 동일한 이름이 마치 ‘거울’과 ‘자화상’ 그 자체 같습니다.
어느 날, 별이 빛나는 밤에 거울처럼 별을 반사한 강(江)의 모습마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처럼 다가옵니다. 처절한 마음을 담았던 프리다 칼로, 100여 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던 렘브란트도 우리가 “자화상”하고 소리 내어 말(發話)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입니다. 내 마음에 비친 음악
사카모토 류이치의 ‘자화상(Self-portrait)’은 노랫말이 없는 연주곡으로 작곡됐습니다. 음반 <음악도감(音樂圖鑑)>에 수록된 이 곡은 나중에 발매된 음반 <1996>에서 어쿼스틱 악기로도 편곡됐는데, 그 이름의 힘 때문인지 들을 때마다 자화상과 거울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이 곡은 한 시대 전에 떠나간 민족시인 윤동주를 우리 곁에 다시 불러냅니다.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 속에는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이 있고,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으니 음악을 들으면 윤동주 시인이 자연스레 생각납니다. 훗날 사카모토 류이치는 일본 제국주의 권력이 저질렀던 폭력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기에, 그의 자화상은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에 닿을 수 있습니다. 요절한 천재 작곡가 유재하 선생의 노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도 거울과 자화상을 떠오르게 하는 음악입니다. 물론 노랫말에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특유의 담백한 음성과 흉내 낼 수 없는 가락이 거울처럼 빛납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 보면 거울 속의 나, 자화상(비록 실재하는 자화상이 없지만) 같은 이미지가 연신 생각납니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슈피겔 임 슈피겔(Spiegel im Spiegel, 거울 속의 거울)’은 무려 거울을 두 번이나 반복한 제목의 음악입니다. 반복적인 선율이 천천히 중첩되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데요. 윤동주 시인과 사카모토 류이치 선생도 이 음악을 듣게 된다면 각자 푸근한 마음으로 자화상을 상상했을 것 같습니다.
동어반복의 미학
자화상과 거울은 실재를 반사하거나 예술적 가치를 담아 빚어낸 것으로, 마치 동어반복된 문장 같습니다. 소설가 김훈 선생처럼 위대한 작가들 중에는 글 속의 동어반복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조금씩 변주하며 반복되는 문장과 주제가 일정한 리듬감을 부여하니 반가움마저 생깁니다.
풀벌레 소리가 한창인 계절에 위대한 예술가 윤동주·유재하·천경자·장욱진부터 사카모토 류이치·아르보 패르트·빈센트 반 고흐, 이런 이국 예술가들의 이름을 되뇌어봅니다. 비록 각각의 이름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저에게는 모두가 동어반복입니다. 바로 자화상과 거울처럼 말입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
스스로 거울이 된 사람
옛 정취를 간직한 서울 정동길 중간의 회전교차로를 지나 서울시립미술관의 상설전시관에 가면 언제든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천경자 화백의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천경자 화백은 작품 속에서 다양한 여인을 그려냈는데, 사실상 작가 스스로를 투영했다고 여러 차례 말했으니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며 자화상을 보는 것처럼 느끼곤 합니다. ‘거울’과 ‘자화상’이라는 이미지를 추구했던 천경자 화백은 이름에도 거울이 들어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작품 하단의 서명 가운데 글자 ‘경(鏡)’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름에 거울이 들어 있다니’ 하고 말입니다. 양가(兩家) 어머니와 아내의 이름에도 ‘경’이 포함되지만, 그 뜻이 거울인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천옥자(千玉子)’라는 이름을 선생이 스스로 바꿔 ‘천경자(千鏡子)’가 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거울이 된 천경자 화백 외에도 우리가 잘 아는 예술가들은 참 자화상을 즐겨 그렸습니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에는 물론이고, 기술 발전이 이뤄져 실물보다 더 실물처럼 보이는 결과물을 얻게 된 이후에도 일부로 애써 자화상을 그리거나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기 때문이죠.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
경기도 양주에도 자화상으로 유명한 예술가를 기념하는 미술관이 있습니다. 장욱진 화백을 기리는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입니다. 장욱진 화백은 ‘길 위의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피란길에 그려졌다는 이 작품에는 전쟁의 폭력성이나 아픔 대신 목가적 풍경 속에서 유유히 걷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작품을 향한 해석이 다양해 무엇이 정확한 의도인지 쉽게 알 수 없지만, 그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자화상이니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화상을 그린 화가’라고 하면 자연스레 장욱진 화백을 떠올리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수십 개의 자화상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형을 아꼈던 동생 테오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 위대한 이름을 그대로 부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동어반복(同語反復)된 것처럼 동일한 이름이 마치 ‘거울’과 ‘자화상’ 그 자체 같습니다.
어느 날, 별이 빛나는 밤에 거울처럼 별을 반사한 강(江)의 모습마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처럼 다가옵니다. 처절한 마음을 담았던 프리다 칼로, 100여 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던 렘브란트도 우리가 “자화상”하고 소리 내어 말(發話)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름입니다. 내 마음에 비친 음악
사카모토 류이치의 ‘자화상(Self-portrait)’은 노랫말이 없는 연주곡으로 작곡됐습니다. 음반 <음악도감(音樂圖鑑)>에 수록된 이 곡은 나중에 발매된 음반 <1996>에서 어쿼스틱 악기로도 편곡됐는데, 그 이름의 힘 때문인지 들을 때마다 자화상과 거울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이 곡은 한 시대 전에 떠나간 민족시인 윤동주를 우리 곁에 다시 불러냅니다.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 속에는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이 있고,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으니 음악을 들으면 윤동주 시인이 자연스레 생각납니다. 훗날 사카모토 류이치는 일본 제국주의 권력이 저질렀던 폭력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기에, 그의 자화상은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에 닿을 수 있습니다. 요절한 천재 작곡가 유재하 선생의 노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도 거울과 자화상을 떠오르게 하는 음악입니다. 물론 노랫말에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특유의 담백한 음성과 흉내 낼 수 없는 가락이 거울처럼 빛납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 보면 거울 속의 나, 자화상(비록 실재하는 자화상이 없지만) 같은 이미지가 연신 생각납니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Arvo Pärt)의 ‘슈피겔 임 슈피겔(Spiegel im Spiegel, 거울 속의 거울)’은 무려 거울을 두 번이나 반복한 제목의 음악입니다. 반복적인 선율이 천천히 중첩되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데요. 윤동주 시인과 사카모토 류이치 선생도 이 음악을 듣게 된다면 각자 푸근한 마음으로 자화상을 상상했을 것 같습니다.
동어반복의 미학
자화상과 거울은 실재를 반사하거나 예술적 가치를 담아 빚어낸 것으로, 마치 동어반복된 문장 같습니다. 소설가 김훈 선생처럼 위대한 작가들 중에는 글 속의 동어반복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조금씩 변주하며 반복되는 문장과 주제가 일정한 리듬감을 부여하니 반가움마저 생깁니다.
풀벌레 소리가 한창인 계절에 위대한 예술가 윤동주·유재하·천경자·장욱진부터 사카모토 류이치·아르보 패르트·빈센트 반 고흐, 이런 이국 예술가들의 이름을 되뇌어봅니다. 비록 각각의 이름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저에게는 모두가 동어반복입니다. 바로 자화상과 거울처럼 말입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