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 리스크가 너무 커지고 있어요.” 한 대기업 기업설명(IR) 담당자의 하소연이다. 탄소 배출량을 정확히 공개하라는 ‘스코프 공시’에 이어 최근엔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계획) 공시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고 있다. 각종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의무화로 업무량이 늘어난 데다 공시 내용이 자칫 행동주의 펀드 등에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탄소배출량·밸류업…'공시 리스크' 커진다

밸류업 공시 독려 나선 거래소

2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현재까지 국내 상장사 가운데 밸류업 계획 공시에 참여했거나 참여를 예고한 기업은 모두 38개사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31곳, 코스닥 상장사 7곳이다. 전체 상장사 중에서는 1.4% 수준이다.

참여율이 낮다보니 금융당국은 이번 공시 권고가 용두사미에 그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별도 지수를 만들어 연내 금융상품도 출시할 계획이었으나 밸류업 공시 참여율이 극히 낮다보니 밸류업 공시를 하지 않은 기업들로 지수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래소는 막판 10대 그룹 상장사 재무담당 임원들을 불러 모아 ‘기업 잡기’에 나서고 있다. 이에 대해 10대 그룹 소속 한 상장사의 공시 담당자는 “밸류업에 참여하면 공시와 동시에 정부와 주주들의 감시망이 붙는 격이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공시 담당 인력도 부족해 현재로선 적극적으로 나서기 쉽지 않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소액주주 단체들도 공격 태세

탄소 배출량을 적시해야 하는 지속가능성 공시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19일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 기업 간담회’를 열어 지난 4월 발표한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기준(ESG공시기준) 공개초안’에 대해 논의했다. 금융위에 따르면 106개 기업 중 96곳이 기후 관련 사항을 먼저 의무공시하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탄소 배출량을 공시하는 ‘스코프’에 대해선 유예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스코프는 직·간접 배출량(스코프1·2)을 비롯해 기업 공급망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모든 탄소 배출량(스코프3)을 유형과 범위에 따라 구분한 항목을 말한다. 특히 스코프3는 제품 생산부터 사용·폐기, 협력업체와 유통망 등 기업이 직접 통제하지 않는 시설에서 발생하는 탄소도 해당돼 재계에서 가장 논란이 큰 항목이다. 예컨대 이마트는 매장에서 판매하는 제품의 탄소 흔적을 공시에 포함하는 것이 원칙이다. 기업들은 정확한 탄소 배출 데이터를 얻기 어려운 데다 배출량 산정에 과도한 비용과 노력이 투입된다며 난색을 보이고 있다.

상장사들이 공시 리스크를 걱정하는 이유는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진행했다가 오히려 기업 가치를 떨어뜨리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한 기업 IR 담당자는 “공시를 소홀히 했다간 각종 소송 리스크에 휘말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밸류업 공시에 나선 DB하이텍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달 중순 밸류업 방안을 공시했는데 오히려 소액주주 대표를 표방하는 단체들로부터 공격의 표적이 되고 있다. 밸류업 보고서가 지난해 내놓은 ‘DB하이텍 경영혁신 계획’과 다를 바 없다는 게 공격의 논리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소액주주 권리 보호를 명분으로 활동하는 국내외 단체가 급증하면서 상장사들의 공시에서 공격 포인트를 잡으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해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20일 ‘밸류업 중간평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어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은 기자 hazz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