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퇴직연금 기금화를 추진하는 건 약 1년 전 도입한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이 의도한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퇴직연금을 방치하지 않도록 해 수익률을 높이고 국민의 노후 생활 대책을 마련하자는 게 이 제도의 도입 취지였다. 하지만 가입자 대부분은 여전히 물가상승률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원리금 보장 상품에 연금을 방치하고 있다. 퇴직연금을 기금화하면 이런 자금의 수익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정치권의 계산이다.

23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국내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규모는 지난 6월 말 기준 23조4985억원이다. 이 가운데 91.4%에 달하는 21조4661억원이 예금 등 원리금 보장 상품에 들어가 있다. 원리금 보장 디폴트옵션 상품의 최근 1년 수익률은 3.48%였다. 이는 원리금 비보장 상품의 같은 기간 수익률(12.05%)보다 훨씬 낮고, 최근 4~5%에 달한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친다.

정부는 디폴트옵션 제도를 2022년 7월부터 시범 운영한 뒤 지난해 7월 정식 도입했다. 금융투자업계는 원리금 보장형 상품 도입에 반대했지만 은행권이 강하게 주장해 이를 관철했다.

디폴트옵션 상품에 가입한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해 3월 3010억원에서 12월 12조5520억원으로 늘었다. 많은 근로자가 디폴트옵션 상품을 지정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원리금 보장 상품을 선택한 것이 저조한 수익률로 이어졌다.

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한 영국, 호주 등의 나라에서는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이 물가 상승률을 넘어선다. 영국 연금 전문회사 펜폴드에 따르면 이 나라 퇴직연금은 최근 5년 동안 연평균 약 7%의 수익을 냈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퇴직연금 제도가 최근 디폴트옵션 등을 도입해 자산 배분 전문성을 강화했지만 기금형에 필적할 수는 없다”고 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