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동 175번지에 있던 허영숙 산원과 이광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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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서촌기행
허영숙 산원과 이광수의 집
허영숙 산원과 이광수의 집
해공 신익희의 집을 나와 조금 걸으면 '자하문로 16길 13'의 패를 단 2층 양옥집에 이른다. 번지로는 효자동 175번지. 1970년대식 슬래브가 있는 잘 지은 이층집이다. 이곳에 지금은 개인 회사가 들어서 있지만 1930년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산부인과가 들어섰던 곳이다. 이 병원의 원장 허영숙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의사 시험에 합격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개업의가 된 사람이다.
1938년에 5월 3일 동아일보에는 "허영숙씨 (여의) 효자정 175번지에 해산전문병원 산원을 개원"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광고에는 '조선 온돌 산실 완비'라는 문구와 '진명고녀시전면'이 눈에 띈다. 진명고녀(진명고등여자학교, 현 진명여고)가 바로 앞에 산원이 있다는 말이다.
월간 <여성>의 기자로 일하던 시인 노천명은 다음과 같은 탐방 기사를 썼다.
조선일보에서 펴낸 잡지 <여성>에 근무하던 시인 노천명은 특별히 이 산부인과에 대한 기사를 썼다. 온돌에서 생활하던 조선의 여인들이 병원에서 갑자기 침대 생활을 하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데, 이를 간파한 허영숙이 조선식 온돌방으로 된 산원을 개업한 것이라 홍보용 기사이다. 노천명의 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진명고녀의 전차 정거장이다. 효자동 지금의 청와대 구역 무궁화동산쯤에 전차의 종점이 있었다. 전차 종점 가기 전에 서는 곳이 진명고녀 정거장이다. 전차는 효자동 종점에서 출발하여 진명고녀(진명여고)를 지나 경복궁 서쪽 모퉁이를 돌아 광화문 앞에서 현재의 율곡로로 가는 노선이었다. 지금은 삼청동으로 가는 길목에 외딴섬처럼 있는 동십자각이 있다. 동십자각이 있다면 당연히 서십자각이 있어야 하는 데 없다. 사라진 서십자각은 전차 노선에 방해가 되어 없앤 것이다. 궤도가 있어야 운행할 수 있는 전차는 구조상 급하게 각도를 꺾어서 운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서십자각을 없애고 전차 궤도를 가설한 것이다.
전차 정거장에서 지척인 허영숙 산원이 있던 이 동네는 지금은 한산하지만 당시에는 무척이나 붐비는 곳이었다. 1989년 목동으로 이사한 진명고녀(진명여고)가 이곳 산원 맞은편에 있었다. 태어나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10대 소녀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동네에 울려 퍼졌을 것이다.
허영숙 해산병원에는 가정집도 딸려 있었는데 이곳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이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춘원 이광수이다. 허영숙의 남편이 이광수이다. 그래서 이곳은 '허영숙 산원'이면서 '이광수의 집'이었던 곳이다. 이광수는 이곳에서 살 때 해방을 맞이했다. 물론 이 집과 남양주 봉선사의 주지로 있던 8촌 이학수의 절에 들락거리기도 했지만... 반민특위에 체포된 곳도 이곳이다. 1950년 7월 12일 그를 북으로 데려가기 위해 북의 혁명 시인 리찬이 찾은 곳도 이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광수만큼 욕을 많이 먹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광수에 대해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문학사와 근대사에서 그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도 그의 작품이고 3·1 만세운동 전에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2·8 독립선언'에서 선언문을 쓴 사람도 이광수이다. 일본 경찰이 왜 그를 감시했는가?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그의 소설과 글에 영향을 받아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1917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해서 이름을 날려 별명으로 '전 조선 여성의 연인'을 얻었다.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 그가 친일의 대명사로 변절했다. 이광수가 아닌 일본 천황의 신민인 고야마 미타로(香山光郞)로 부르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있던 허영숙 산원의 이름도 '가야마 산원'으로 바꿔 달았다. 그의 친일 발언 중 가장 심한 것이 소위 '이마빡론'이다.
"조선 놈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미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과 같은 글을 쓰기 시작해서 변절하기 시작했다. 3·1운동이 지나고 몇 년 후이다. 그가 2·8 독립선언문 작성 이후 계속 민족적 지조를 지켰다면 서울에 그의 동상이 몇 개는 서 있었을 것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춘원을 능가할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그런 이광수를 가까이서 보필한 사람이 허영숙이다. 이광수는 1921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돌아와 <감사와 사죄>라는 소설을 썼는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선물을 두 가지를 꼽으라면 도산 안창호 선생과 그의 아내 허영숙이라고 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도산이 그에게 아버지라면 허영숙은 어머니였다'고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서 썼다. 허영숙은 이광수에게 어떤 존재인가? 아내 허영숙이 없었다면 이광수는 이미 폐병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오산학교의 교사였던 춘원은 도산 안창호의 중매로 백혜선을 만나 결혼했지만, 유부남 신분으로, 동경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모던걸 허영숙을 만난다.
사실 이광수는 고아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폐병쟁이에 불과했다.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 중인 허영숙은 춘원을 일본의 대문호에 비유하여 ‘조선의 나쓰메 소세키’라고 우러러보았다. 어린 나이에 콜레라로 부모를 잃고 동학당에 들어가 손병희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 생활을 하던 이광수는 가난할뿐더러 자기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는 천애의 고아였다. 함께 유학생으로 어울렸던 사람들이 주요한, 전영택, 최승구, 나혜석 등이다. 그들은 함께 잡지도 내고 더러는 연애도 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병원에 근무하던 허영숙은 폐병 환자 이광수를 불쌍히 생각해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심지어는 각혈로 쓰러져있는 이광수를 발견해서 목숨까지도 구했다. 이광수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인 1918년은 일본의 결핵 사망자가 14만 명을 넘던 시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화가인 나혜석이 그토록 사랑한 최승구도 결핵으로 사망했다. 민족의 암담한 미래를 밝힐 재목들이 하나둘 결핵으로 이역 땅에서 사라졌다. 나혜석은 연인 최승구가 죽고 나서 자신이 허영숙처럼 이광수를 간병했다면 연인을 죽이지 않았을 거라고 늦은 후회를 했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병원균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지만 당시의 폐병은 극복하기 어려운 불치의 병이었다. 이광수보다 한참 뒤에 태어난 소설가 김유정도 시인 이상도 결핵으로 죽어 나갔다.
허영숙은 동아일보에서 학예부장으로 일하던 남편이 병으로 눕게 되자 남편 대신 기자가 되어 기사를 쓰기도 했다. 성병에 걸린 사람은 법으로 혼인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남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10일) 이광수가 납북되고 혼자서 세 자녀를 기른 허영숙은 말년에 자녀들이 사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떠났고 몇 년 후 춘원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직도 그에 대한 평가는 팽팽하다. 우리의 대문호라는 평가와 친일 매국노라는 프레임이다.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와 같은 사람이라던 춘원 이광수를 기억하는 공간이 없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효자동 175번지. 지금은 이광수도 허영숙 산원도 돌덩이로 된 표석 하나 없는 이곳에 서면 쓸쓸해지는 것은 우리의 역사가 너무도 고단하기 때문이다.
한이수 칼럼니스트
효자동 가는 전차를 타고 진명고녀 앞에서 내려 들어가노라면 삼분을 채 못 걸어 바로 길가에 유난히 눈에 띄는 아담한 순조선식 큰 건물 하나가 있다. (중략) 여기가 허영숙씨가 새로 개업한 씨의 산원이다…이 온돌 따뜻한 방에서 해산을 해온 조선 부인들이 병원에 갑자기 들어가 침대 우에서 느끼던 종래의 불편을 일소하기 위해서 여기는 순 조선식의 좋은 점을 살려가지고 우리 부인들에게 맞게 설비한 점이라고 한다…
- '허영숙산원 탐방기' <여성> 1938. 12.
조선일보에서 펴낸 잡지 <여성>에 근무하던 시인 노천명은 특별히 이 산부인과에 대한 기사를 썼다. 온돌에서 생활하던 조선의 여인들이 병원에서 갑자기 침대 생활을 하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데, 이를 간파한 허영숙이 조선식 온돌방으로 된 산원을 개업한 것이라 홍보용 기사이다. 노천명의 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진명고녀의 전차 정거장이다. 효자동 지금의 청와대 구역 무궁화동산쯤에 전차의 종점이 있었다. 전차 종점 가기 전에 서는 곳이 진명고녀 정거장이다. 전차는 효자동 종점에서 출발하여 진명고녀(진명여고)를 지나 경복궁 서쪽 모퉁이를 돌아 광화문 앞에서 현재의 율곡로로 가는 노선이었다. 지금은 삼청동으로 가는 길목에 외딴섬처럼 있는 동십자각이 있다. 동십자각이 있다면 당연히 서십자각이 있어야 하는 데 없다. 사라진 서십자각은 전차 노선에 방해가 되어 없앤 것이다. 궤도가 있어야 운행할 수 있는 전차는 구조상 급하게 각도를 꺾어서 운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서십자각을 없애고 전차 궤도를 가설한 것이다.
전차 정거장에서 지척인 허영숙 산원이 있던 이 동네는 지금은 한산하지만 당시에는 무척이나 붐비는 곳이었다. 1989년 목동으로 이사한 진명고녀(진명여고)가 이곳 산원 맞은편에 있었다. 태어나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10대 소녀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동네에 울려 퍼졌을 것이다.
허영숙 해산병원에는 가정집도 딸려 있었는데 이곳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이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춘원 이광수이다. 허영숙의 남편이 이광수이다. 그래서 이곳은 '허영숙 산원'이면서 '이광수의 집'이었던 곳이다. 이광수는 이곳에서 살 때 해방을 맞이했다. 물론 이 집과 남양주 봉선사의 주지로 있던 8촌 이학수의 절에 들락거리기도 했지만... 반민특위에 체포된 곳도 이곳이다. 1950년 7월 12일 그를 북으로 데려가기 위해 북의 혁명 시인 리찬이 찾은 곳도 이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이광수만큼 욕을 많이 먹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광수에 대해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문학사와 근대사에서 그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도 그의 작품이고 3·1 만세운동 전에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2·8 독립선언'에서 선언문을 쓴 사람도 이광수이다. 일본 경찰이 왜 그를 감시했는가?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그의 소설과 글에 영향을 받아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1917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해서 이름을 날려 별명으로 '전 조선 여성의 연인'을 얻었다.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 그가 친일의 대명사로 변절했다. 이광수가 아닌 일본 천황의 신민인 고야마 미타로(香山光郞)로 부르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있던 허영숙 산원의 이름도 '가야마 산원'으로 바꿔 달았다. 그의 친일 발언 중 가장 심한 것이 소위 '이마빡론'이다.
"조선 놈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미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과 같은 글을 쓰기 시작해서 변절하기 시작했다. 3·1운동이 지나고 몇 년 후이다. 그가 2·8 독립선언문 작성 이후 계속 민족적 지조를 지켰다면 서울에 그의 동상이 몇 개는 서 있었을 것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춘원을 능가할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그런 이광수를 가까이서 보필한 사람이 허영숙이다. 이광수는 1921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돌아와 <감사와 사죄>라는 소설을 썼는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선물을 두 가지를 꼽으라면 도산 안창호 선생과 그의 아내 허영숙이라고 했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도산이 그에게 아버지라면 허영숙은 어머니였다'고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서 썼다. 허영숙은 이광수에게 어떤 존재인가? 아내 허영숙이 없었다면 이광수는 이미 폐병으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오산학교의 교사였던 춘원은 도산 안창호의 중매로 백혜선을 만나 결혼했지만, 유부남 신분으로, 동경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모던걸 허영숙을 만난다.
사실 이광수는 고아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폐병쟁이에 불과했다.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 중인 허영숙은 춘원을 일본의 대문호에 비유하여 ‘조선의 나쓰메 소세키’라고 우러러보았다. 어린 나이에 콜레라로 부모를 잃고 동학당에 들어가 손병희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 생활을 하던 이광수는 가난할뿐더러 자기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는 천애의 고아였다. 함께 유학생으로 어울렸던 사람들이 주요한, 전영택, 최승구, 나혜석 등이다. 그들은 함께 잡지도 내고 더러는 연애도 하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병원에 근무하던 허영숙은 폐병 환자 이광수를 불쌍히 생각해 정성껏 치료해 주었다. 심지어는 각혈로 쓰러져있는 이광수를 발견해서 목숨까지도 구했다. 이광수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인 1918년은 일본의 결핵 사망자가 14만 명을 넘던 시절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화가인 나혜석이 그토록 사랑한 최승구도 결핵으로 사망했다. 민족의 암담한 미래를 밝힐 재목들이 하나둘 결핵으로 이역 땅에서 사라졌다. 나혜석은 연인 최승구가 죽고 나서 자신이 허영숙처럼 이광수를 간병했다면 연인을 죽이지 않았을 거라고 늦은 후회를 했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병원균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지만 당시의 폐병은 극복하기 어려운 불치의 병이었다. 이광수보다 한참 뒤에 태어난 소설가 김유정도 시인 이상도 결핵으로 죽어 나갔다.
허영숙은 동아일보에서 학예부장으로 일하던 남편이 병으로 눕게 되자 남편 대신 기자가 되어 기사를 쓰기도 했다. 성병에 걸린 사람은 법으로 혼인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서 남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10일) 이광수가 납북되고 혼자서 세 자녀를 기른 허영숙은 말년에 자녀들이 사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떠났고 몇 년 후 춘원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직도 그에 대한 평가는 팽팽하다. 우리의 대문호라는 평가와 친일 매국노라는 프레임이다.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와 같은 사람이라던 춘원 이광수를 기억하는 공간이 없다.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효자동 175번지. 지금은 이광수도 허영숙 산원도 돌덩이로 된 표석 하나 없는 이곳에 서면 쓸쓸해지는 것은 우리의 역사가 너무도 고단하기 때문이다.
한이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