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위험한 길, '평등에의 탐닉'
오늘날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경제 성적표를 보면 온전한 나라가 없어 보인다. 모두가 정치권 분열은 물론 저성장·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다. 민주주의 정치는 경제에 도움이 되는 제도인가?

경제학은 아직 이 문제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정치는 이념의 세계인 반면 경제학은 소위 이념을 사상(捨象)한 과학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 이념이 경제 번영에 도움이 되는지 경제학은 판단하기를 거부한 셈이다.

다행히 경제학에서 종종 거론되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정치의 경제적 역활에 대한 답을 시사한다. 이 법칙은 금화와 은화, 동화를 같이 쓰면 금화는 사라지고 은화나 동화만 사용되고 더 나아가 은화도 사라져 동화만 사용된다는 법칙이다. 값어치가 나가는 양화(금화)는 사장되고 값어치가 떨어지는 악화(은화나 동화)만 사용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법칙은 통화당국이 세 가지 금속화폐에 동일한 교환가치를 부여할 때만 작동한다. 금속의 실제 사용 가치에 따라 그 교환가치가 결정되도록 허용하면 이런 문제는 사라진다. 질적 차이를 무시한 평등주의적 정책은 질적 하향평준화를 초래한다는 경고다.

이 법칙은 실력이나 이룬 성과가 서로 다른 국민을 정치적 이념인 평등주의 때문에 모두 같게 취급해 평등하게 직(職)을 나누거나 지원과 보상을 획일화하면 사회에도 악화가 넘쳐 결국 체제 자체가 붕괴된다는 의미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북한의 처참한 현실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가 오늘날 저성장과 양극화를 겪는 이유도 바로 정치가 복지국가를 위한 재분배 정책에 매몰돼 열심히 노력하는 성공한 국민과 기업은 폄훼하고 표가 많은 다수의 그렇지 못한 국민만 우대한 탓이다. 성공한 기업과 국민이 준 것은 당연한 결과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절대평등의 상징인 1인 1표의 보통 선거제도를 채택한다. 이런 제도에서는 표가 많은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펴야 집권이 가능하기 때문에 민주정치는 소수인 양화를 홀대하고 그렇지 못한 다수를 우대하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무차별적인 평등주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와 경제의 현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제헌헌법은 당시 세계를 풍미한 사회주의적 평등주의 이념인 ‘사회정의와 균형발전’을 경제 질서로 수용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개발연대에는 다소 잠잠했던 이 기조가 소위 민주화 이후 본격적으로 되살아났다. 오늘날 한국 정치권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평등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있다. 이제 경제·사회적 차이를 원인 불문하고 용인하지 못하는 성향이 국민과 정치권에 만연하다. 행정부도 이에 추종해 국민을 부자와 빈자로 나눠 전자를 차별하는 평등주의적 제도와 정책 성향이 보편화됐다. 예컨대 대기업에 대한 역차별적 규제와 획일적인 중소기업 지원정책으로 기업 성장이 정체되고, 정부의 과세권을 부와 소득의 평준화를 위한 수단으로 남용했다. 학교에서는 평준화 교육 이념과 성과를 경시하는 보상체계로 선생과 학생의 수월성이 훼손됐다. 수도권 규제와 획일적인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국토 이용의 비효율과 지방의 하향 평준화를 초래했다.

오늘날 경제·사회적 평등은 모든 사회가 원하지만 실현하지 못하는 난제다. 그동안 사회주의 사상은 결과의 평등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한 후 기회의 평등을 내걸고 자본주의사회에 깊숙이 침투했다. 이제 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기회의 평등’을 태업을 피하면서 경제적 평등을 이룰 수 있는 묘안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성과에 따른 차별적 선택 기능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기회’야 말로 ‘결과’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노력의 대가로 시장으로부터 보상받는 경제재(經濟財)이지 정부가 무슨 공공재(公共財)처럼 나눠줄 수 있는 게 아님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정치권은 하루빨리 평등 탐닉 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엄격하게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모든 국민이 사회에 기여한 만큼 시장으로부터는 물론 국가로부터 공정하게 대접받는 정의로운 사회를 제도화해야만 한다. 그래야 한국의 제2의 도약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