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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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는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돼 있다. 한국의 세종시만 한 면적의 가자지구 전쟁에 1만여㎞ 떨어진 미국이 항공모함 전단을 보내고, 섬나라 일본의 중앙은행 총재가 금리 인상 여부에 대한 힌트를 던질 때마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출렁거리고, 아프리카 한 국가의 가뭄에 점심시간에 마시는 커피 가격이 오른다. 북핵 문제,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 코로나19, 지구 온난화 등 국제사회가 다 함께 팔을 걷어붙여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산적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5000만 국민, 750만 재외동포뿐만 아니라 80억 세계시민을 향해 취임사를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괴담·극단주의 끊어내자…'월클 시민'이 인류 공동가치 지킨다

부끄러운 시민의식

세계시민으로서 우리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US뉴스앤드월드리포트가 매긴 2024년 ‘세계 최고의 나라’ 순위에서 한국은 시민의식 분야 42위에 그쳤다. 덴마크(1위) 네덜란드(8위) 등 유럽 국가와 미국(20위) 일본(24위)은 물론 아르헨티나(32위) 브라질(35위) 남아프리카공화국(38위) 등에도 뒤졌다.

일본인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 높은 질서의식으로 세계 각국에 깊은 인상을 줬다. 한국은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았다. 불꽃축제를 보려는 운전자들로 서울 강변북로가 주차장이 되는가 하면, 핼러윈 행사의 무질서한 행렬이 안전관리 부실과 겹쳐 안타까운 이태원 참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익명에 기댄 온라인상의 모습도 부끄럽다. 2022년 연세대 바른ICT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69세 인터넷 사용자 1000명 중 46.5%가 악성 댓글 피해를 직·간접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최대 35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위협받는 자유와 인권

유네스코는 세계시민의 조건으로 자유, 인권, 다양성, 정의, 민주주의, 배려, 차별하지 않음, 관용 등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고 문제해결능력,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의사결정능력 등 인지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초로 2015년부터 인성교육을 의무화한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고 있긴 하다. 이 법에서는 ‘핵심 가치·덕목’으로 예(禮), 효(孝),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 등 주로 전통적인 가치·덕목을 들고 있다. 자유, 인권, 다양성, 민주주의, 차별하지 않음, 관용 등의 가치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자유와 인권에서 아직 갈 길이 멀다. 근대사회의 시민은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일종의 명제에서 탄생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 가치부터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집권당이던 지난 정부 시절 헌법 4조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를 빼려는 시도를 했다.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법을 추진하기도 했다. 야당이 되고 난 후 22대 국회 들어서는 ‘헌법 부정·역사 왜곡 행위자를 공직에 임명해선 안 된다’는 법안을 발의했다. 특정 세력이 법을 악용해 친일몰이로 마녀사냥을 할 우려가 크고 이 경우 표현과 학문, 양심의 자유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노조와 시민단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도로를 점거한 채 불법시위를 일삼으며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이동권을 주장하는 장애인들이 다른 시민의 이동권은 무시하며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기 일쑤다. 집회·시위의 확성기 소음에 행복권·환경권도 위태로운 지경이다. 지역과 계층을 따질 문제도 아니다.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주민들은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C노선 우회를 요구하며 시공사 현대건설이 속한 현대자동차그룹의 정의선 회장 집 앞에서 ‘민폐 시위’를 벌이다가 법적인 제지를 받기도 했다.

허위 정치 선동에 흔들리는 사회

기업들은 해고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강한 미국 경제의 배경으로 고용 유연성을 꼽는다. 해고도, 재고용도 쉽기 때문에 달라진 시장 환경에 맞는 기업으로 인력이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도전과 혁신의 자유도 한국에서는 ‘레어 아이템’이다. ‘타다’ ‘로톡’ 같은 혁신 플랫폼은 기득권에 가로막혀 날갯짓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표 계산에 밝은 정치권은 소수 혁신가보다 다수 기득권자를 감싸고 돌기 일쑤다. 집단과 정치의 힘으로 지대를 추구하려는 세력이 득세하는 이유다.

한국 사회는 허위 정치 선동으로도 몸살을 앓고 있다. 2008년 ‘광우병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공중파 방송과 종교인, 시민단체가 손잡고 ‘뇌 송송, 구멍 탁’이란 괴담을 퍼뜨려 나라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이제 와서 피해 배상은커녕 잘못했다고 사과 한마디 하는 책임자가 없다. 거짓 들통에 대한 ‘염치없음’의 절정판이다. 2016년 경북 성주군에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가 배치될 땐 “전자파가 사람을 튀겨 죽인다”는 괴담이 돌았다. 정치 선동 앞에 이처럼 과학이 무력해지는 국가는 선진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법치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거듭나려면 타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그 가치의 소중함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현 정부가 문재인 정부 시절 중·고교 교과서에서 없앤 ‘자유민주주의’ 용어를 내년부터 되살리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자유’를 뺀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로 흐르기 십상이다.

법치도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는 공권력의 힘을 어김없이 보여줘야 한다. 헌법과 법률 위에 ‘떼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법조문은 타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야 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도 선량한 시민의 사생활 평온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

법치를 확립하려면 사법 체계가 공정하게 작동해야 한다. 정치인같이 권력을 쥔 소수뿐만 아니라 노조, 시민단체, 이익단체 등 다수의 힘으로 의사를 관철하려는 집단에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정부는 국민 의견을 적극 수용해 정책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한국행정연구원에 따르면 자신의 행동이 정치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는 인구의 비율인 ‘정치적 역량감’은 2021년 21.2%에서 2022년 15.2%로 고꾸라졌다.

삶의 질 선진국으로 나아갈 때

한국은 또한 경제 선진국을 넘어 ‘삶의 질’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경제 성장과 함께 각종 생활지표가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기대수명은 2023년 기준 83.6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80.3세를 웃돌며 의료 접근성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같은 해 기준 한국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69.6%로 OECD 회원국 중 1위였다.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기초연금 등 노인복지 제도도 확충됐다.

그러나 국민이 체감하는 삶의 질 수준은 낮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국민의 지난 3년(2020~2022년)간 삶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5.95점으로 OECD 평균(6.69점)보다 낮았다. 38개 OECD 회원국 중 35위에 그쳤다.

자살, 이혼, 교통사고 등 사회 지표는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2021년 기준으로 한국의 자살자 수(자살률)는 인구 10만 명당 23.6명에 달했다. OECD 회원국 중 1위다. 국민의 정신 건강에 ‘빨간 불’이 들어온 상황이다. 이혼율은 2020년 기준 인구 1000명당 2.1건으로 역시 OECD 평균(1.7건)을 웃돈다. 가족 공동체가 그만큼 약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2021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5.6명으로 OECD 평균인 5.2명보다 많다. 기본적인 교통 규범 준수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공동체 의식을 토대로 삶의 질을 끌어올려야 한다. ‘혼자 가기’보다 ‘함께 가기’를 선택해야 할 때다. 정부와 공공기관부터 투명성을 높여 사회 전반의 신뢰성을 강화해야 한다. 하루빨리 국민연금을 개혁해 ‘공동체가 안정적인 노후를 보장해 준다’는 믿음을 국민에게 심어줘야 한다.

공동체 의식은 세계시민으로서의 기본 소양이기도 하다. 세계는 한국 국민이 지구촌 공동체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며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책임감 있게 나서는지 지켜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초일류 시민의 국가로 발돋움해야 한다. 한국이 또 다른 60년을 어떤 식으로 맞이할지에 대한 해답은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 있다.

임도원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