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레터] 녹색 수혈
‘하늘의 명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훌쩍 넘긴 후 제 아침 루틴은 약 먹기부터 시작됩니다. 눈을 뜨자마자 고혈압과 고지혈증 약을 입에 털어 넣은 뒤 그제야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는 게 일상이 됐죠.

중년에게 고혈압 같은 심뇌혈관계 질환은 평생 달고 살아야 할 지병이라지만,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사망 위험 요인 1위로 고혈압을 지목했으니 신경을 안 쓸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불규칙한 식생활, 운동 부족, 잦은 음주와 흡연,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직업병이라고 핑계를 대 보지만 몸 전체에 흐르는 탁한 피를 맑게 해줄 뾰족한 묘안은 없습니다.

기업 역시 업력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히고, 조직의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기업의 건강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순간이죠.

최근에는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 조건으로 녹색 전환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파리기후변화협약 이후 기업에 탄소중립은 의무가 되고 있고, 기업이 탄소중립을 추진하거나 그린 비즈니스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금조달 문제가 큰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전환 금융’이라는 개념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오는 2030년까지 452조 원 규모의 정책 금융을 투입할 것이라는 정부 당국의 발표가 있었죠. 민간까지 합치면 전환 금융 수요는 1000조 원까지 예상된다는 관측도 있습니다.

기존 녹색 금융이 풍력터빈, 태양광, 탄소포집·저장 같은 녹색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지원되는 자금줄이라면 전환 금융은 순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하려는 기업에 폭넓게 지원되는 ‘녹색 수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6월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오는 2050년까지 넷제로 달성을 위해 저탄소 방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인 ‘기후 전환’에 약 125조 달러(약 16경6900조 원)의 자금이 필요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 바 있고, 컨설팅 기업 맥킨지는 2021~2050년 동안 전 세계에 걸쳐 연간 9.2조 달러(약 1경2000조 원)가 필요하다고 추산했습니다.

정부 주도로 녹색 전환에 필요한 어마어마한 자금을 공급키로 했으니 이제 아무 걱정 없이 기업들이 건강해지는 일만 남은 것일까요? 정부의 확실한 정책 의지와 전환 금융 가이드라인, 기업의 신뢰도 높은 전환 계획 추인, 금융 리스크에 대한 예방책 등 확실한 처방전을 고민해야 할 시점은 아닐까요?

이에 〈한경ESG〉는 10월호 커버 스토리 ‘450조 시장, 전환 금융 새판 짜기’를 통해 유럽연합(EU)과 일본 등 글로벌 전환 금융의 동향을 살피고, 국내외 전문가에게 전환 금융 연착륙 조건을 들어봤습니다. 기업과 금융이 함께 건강해지는 ‘녹색 수혈’이 혈관을 따라 잘 흘러 들어갈 수 있게 말이죠.

글 한용섭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