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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경에세이] 죽음이라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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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수미 테일트리 대표
    [한경에세이] 죽음이라는 선생님
    실리콘밸리에 살면서 커리어의 첫 10년은 이름만 들어도 아는 큰 기업들에서 일했다. 2012년 당시 꽤 핫하다는 게임 개발 스타트업으로 옮기면서 더 바쁜 삶을 살았다. 세계 여러 나라로 출장을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여러 사람과 일하는 내 삶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싱글이기 때문에 시간적, 금전적 여유도 많아 쇼핑도 잦았고, 멋진 식당에서 분위기를 즐기기도 했다. 나름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012년 1월, 내 생각을 뒤집는 사건이 일어났다. 출장 가기 위해 부른 옐로캡 택시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가던 중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냈다. 장시간의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엎드린 상태에서 등을 열고 수술을 받아 눈이 돌출되고 초점을 잃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병실에서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던 중 갑자기 밝은 빛이 보였다. 한여름 태양빛보다 훨씬 환하지만 온화한 빛이었다.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빛은 보였다. 그리고는 삽시간에 영화에서나 볼 법한 필름 롤이 빠르게 지나갔다. 내 가족, 친구,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엄청나게 빠르게 지나갔다. 짧은 시간 동안 살면서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의 얼굴이 한꺼번에 지나가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며칠 후 눈은 회복됐지만, 척추 5개를 접합하는 수술을 받아 한동안 혼자서는 돌아눕지도 못했다. 함께 사는 언니는 잠도 자지 않고 옆에서 계속 내 몸을 돌려줬다. 매일 병실에는 절친들이 찾아와 농담도 해주고 잡지를 놓고 갔으며, 진통제로 입맛을 잃은 나에게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가져다줬다. 너무 감사했다. 의사, 간호사, 간호 보조사 모두 따뜻하게 대해주고 용기를 줬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 간호사는 내 팔에 링거를 꽂기 위해 여러 번 주사를 찔렀고, 팔은 금세 시커멓게 변했지만 나는 계속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천천히 다시 해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

    사람들이 고마웠다. 병실 밖 유칼립투스 나무와 그 나무를 흔드는 바람도 고마웠다. 그날, 만약 그 택시기사처럼 생을 마감했다면 가장 안타까웠을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출장 가서 맺으려던 큰 계약도, 그 계약을 축하하는 호화스러운 디너도 아니었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보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이 가장 소중했다.

    우리는 항상 내일이 오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할 때가 많다. 하지만 오늘만큼 중요한 날은 없다. 나는 오늘 내 옆에 있는 가족, 친구, 스쳐 가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내일이 없다면 오늘이 이들과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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