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비확산 체제의 핵심 축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라파엘 그로시 사무총장이 어이없게도 ‘북핵 용인론’을 들고나왔다.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임을 인정하고 “국제사회가 대화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북핵 저지를 위해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30여 년간 제재를 지속해 온 국제사회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는 무책임한 발언이다.

‘북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좀 더 유연하게 대화를 모색하자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대화를 하지 않아 상황이 악화됐다’는 취지의 주장은 사태의 책임을 북이 아니라 국제사회로 돌리는 듯해 영 불편하다. “북한의 핵 보유는 불법이며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던 자기 말을 손바닥처럼 뒤집은 것이라 당혹스럽다.

북핵을 인정하는 순간 비핵화는 물 건너가고 모든 논의는 군축·통제라는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들 수밖에 없다. 이는 한반도 및 세계 평화·안정이라는 국제사회의 일치된 목표를 형해화하고 말 것이다. 당장 북한은 7차 핵실험 감행을 저울질하는 등 위협 수위를 높일 것이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중동권 국가들도 핵무기 확보에 혈안이 될 것이다.

그로시의 발언이 아니라도 ‘북한 비핵화’를 위한 단일대오는 수시로 위협받고 있다. 러시아는 노골적인 북한 편이다. “이미 자체 핵우산을 갖고 있다”(푸틴)며 북핵을 기정사실화하더니 엊그제는 외무장관이 “북 비핵화는 종결된 문제”라고 했다. 미국 내 기류도 미묘하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핵심 문구를 당 정강에서 뺐다. 두어 달 전의 일이다. 트럼프 당선 땐 북핵을 용인할 것이란 관측도 만만찮다.

북핵 타협론을 불식하기 위한 외교 대응이 시급하다.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면 핵확산금지조약(NPT)은 설 자리를 잃고 핵무장 도미노는 정해진 수순이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일본과 함께 미국 유럽연합(EU) 등을 설득해 ‘북한 비핵화’라는 궁극적 목표를 재천명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