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보험회사 자회사에서 영업 업무를 맡고 있는 A씨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을(乙)’의 입장에서 많은 고객을 만나다 보니 생기는 고충인데, A씨에겐 그나마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 있다. 회사 복지 프로그램으로 영업을 나가기 전에 받는 네일케어 서비스다. 한화생명금융서비스는 장애인 직원 45명을 채용해 영업직군을 대상으로 네일케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내 카페와 행정 지원 등 단순 업무가 많던 장애인 일자리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이에 적극적인 기업 중 하나가 한화생명이다. 지난해 보험업계 최초로 장애인 의무고용률(3.1%)을 초과 달성한 한화생명은 네일케어 외에도 시각장애인 헬스키퍼 20명을 채용해 감정노동으로 스트레스 강도가 높은 콜센터 직원들에게 안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픽=전희성 기자
그래픽=전희성 기자

장애인과 함께하는 기업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등록장애인은 264만1896명으로 전체 인구 중 5.1% 수준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 통계를 보면 2022년 장애인 고용률은 50.3%였다. 이는 주요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주요국 장애인 고용률을 살펴보면 에스토니아와 덴마크가 각각 64.9%, 60.1%로 60%를 웃돌았다. 캐나다(59.4%) 프랑스(56.9%) 영국(53.6%) 독일(53.3%) 등도 한국보다 높았다.

장애에 대한 인식과 고용률에선 여전히 큰 격차를 보이고 있지만 국내에서도 긍정적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장애인 고용 의무를 충족하기 위해 장애인 직원에게 단순 업무를 주는 것을 넘어 장애별 특화 업무를 맡기는 식이다.

자라리테일코리아는 발달장애인 특화 직무를 발굴했다. 이 회사에선 발달장애인 직원 19명이 의류매장 재고 관리와 판매 업무를 담당한다. 메가존클라우드는 장애인고용공단이 운영하는 청년 장애인 ICT 전문가 육성 프로그램(SIAT)을 통해 장애인 직원 6명을 정보기술(IT) 직무에 채용했다.

한국훼스토와 한국화이자제약은 고용노동부의 청년 장애인 일경험 프로그램(BTS)에 참여해 장애 청년들에게 업무 경험을 제공하는 등 장애인 채용을 늘릴 계획이다. BTS는 장애인 채용 수요가 높은 경영·사무, 홍보·마케팅 등의 직무를 중심으로 청년 장애인에게 일 경험을 쌓을 기회를 준다.

해외에선 자폐스펙트럼 특수부대도

해외에선 장애인이 지닌 특성을 특정 업종에 맞춰 활용하려는 시도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일본을 주무대로 하는 인적관리(HR) 솔루션 기업 퍼솔켈리는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활용해 첨단 IT 인재를 길러내는 ‘뉴로다이브’ 사업을 추진 중이다. 퍼솔켈리는 발달장애를 가진 20~30대 청년을 인공지능(AI)·디지털 마케팅 등의 분야에 다수 취업시켰다. 발달장애 특성상 규칙성 있는 작업에 능숙하고 집중력·비판적 사고력이 뛰어난 만큼 IT 직종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장애인으로 구성된 군(軍)부대를 운영하는 나라도 있다. 이스라엘군은 자폐스펙트럼이 있는 군인들로 정보부대(9900부대)를 운영하고 있다. 이 부대 소속 군인들은 뛰어난 분석력을 토대로 미세한 시각 정보를 포착해 작전 중인 군인들에게 최상의 데이터를 제공한다. 미국의 비영리 직업학교 익셉셔널마인즈 출신 발달장애 청년들은 ‘스타워즈’, ‘어벤져스’ 등 200여 편의 영화 제작 과정에서 영상 가공 업무를 맡기도 했다.

이 밖에 애플 알리안츠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소니 등 주요 기업은 ‘장애인 배제 종식’을 경영의 우선순위로 삼겠다는 장애인 포용 캠페인인 ‘밸류어블 500’에 동참하고 있다.

정부도 외면하는 장애인

주요 선진국을 벤치마킹하며 국내에서도 장애인 채용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지만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장애인 고용 의무를 부담하는 300인 이상 기업 중 의무고용률(3.1%)을 채우지 못하고 고용 노력조차 하지 않는 곳이 428개(2022년 기준)에 달했다. 상시근로자 1000명 이상 기업 중에서도 의무고용률을 지키지 않은 곳이 64개였다.

솔선수범해야 할 공공 부문도 장애인 고용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공공기관 88곳은 의무고용률(3.6%)을 채우지 못했다. 이 중 47개 기관은 최근 5년간 의무를 미이행해 장애인 고용 노력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은 경영 효율 문제를 이유로 선뜻 장애인 고용에 나서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8월 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이 펴낸 학술지 ‘장애와고용’에 따르면 장애인 근로자 비율이 높을수록 기업 매출과 영업이익이 낮아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장애인 고용 기업 1970곳을 분석한 결과다. 적어도 재무적 측면에선 기업이 장애인을 고용해야 할 유인이 없는 셈이다.

나운환 대구대 재활상담학과 교수는 “이전에는 장애인 개인을 어떻게 훈련해 역량을 키울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제는 기업이 채용한 장애인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사업장 환경, 업무 도구, 동료 근로자 구성 등을 어떻게 보장해야 고용 성과가 나타날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 잡리포트 취재팀

백승현 좋은일터연구소장·경제부 부장
곽용희 경제부 기자·이슬기 경제부 기자
권용훈 사회부 기자·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