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가을엔 왜 기억력이 좋아질까
지난주 몸이 세 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바빴다. 서울에서 광주로. 다시 광주에서 영덕으로. 다시 포항에서 서울로 그렇게 바삐 움직이다 보니 문득 가을이 가까이 와 있다. 가을비가 지나간 자리가 서늘해서 좋다. 싱그러운 여름날을 한 일도 없이 뭉텅뭉텅 보내버렸다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렇다고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다. 좋은 일은 상심한 자리에 씨를 뿌리니까.

경북 지역 국어 교사 모임 씨앗의 초청을 받아 영덕 연수원에 다녀왔다. 강연장에 들어서자 커다란 스크린화면 맨 위쪽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시인과 밤을 지새운 적 있나요?” 나의 고교 선배이자 씨앗 회장이기도 한 박민 선생님이 보낸 문자가 그제야 기억났다. “밤새 시 읽고, 노래하고, 술 마시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그때 나는 노래를 빼는 조건으로 승낙했다.

이날 사회를 본 씨앗 회장님이 준비한 영상 자료는 지금껏 내가 해온 행사 포스터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 내가 하는 모임들이 다 재미있어 보인다고 했는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시버거’를 이야기할 땐 나도 생기가 돌았다. ‘시버거’는 내가 하는 프로그램 중에서도 서둘러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즉석 시 창작 프로그램이다. 사물의 마음을 패티처럼 쌓아 올려 만든 ‘시버거’ 하나 낭독하고 나면 절로 감탄이 터진다. 그게 다다. 시인의 문장을 재료 삼아 자기가 만든 ‘시버거’를 함께 나누는 것. 그것만으로도 허기진 마음이 가시고 배가 부르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감탄이 터져 나왔는데, 그 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다. 함께 나눌 대상을 머금어야 나올 수 있는 감탄이었다.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과 함께할 생각에 들뜬 표정들을 마주하며 나까지 가슴이 뛰었다. 누군가 시인으로 사는 게 행복하냐고 물었다. 이런 장면 속에 함께 있다는 게 행복이 아니면 무얼까?

이렇게 좋은 선생님들과 밤새 시를 읽고 마음에 담긴 문장 하나를 첫 문장 삼아 시를 지었다. 누군가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서로의 가장 빛나는 뿔을 잘라내야 한다면”(사슴뿔 자르기, 창비) “네 걸 자르자” 해서 웃음이 터졌다. 한바탕 웃고 난 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러다가 간혹 학생들 때문에 속상한 일을 털어놓기도 했는데, 내가 듣기엔 모든 고민이 아름다웠다. 세상에 국어 선생님들이 이들만 같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민구 시인의 시 ‘가을이라고 하자’에 나오는 도랑에 의하면 “어제까지 기억이 났는데 원래, /기억이라는 게 하루 사이에 흘러가기도 하는 거” 아닌가 하겠지만, 나는 외로워서 기억을 먹고 사는 쪽이다. 흘러가면서 깨지는 기억은 되레 선명하다.

‘올봄 헤어진 연인들을 위하여’란 행사에서 준비한 시를 읽으며 떠올린 기억들이 그렇다. 어느 독자가 플러팅하는 법에 관해서 물었는데 나도 모르게 “실수로 무릎에 앉으세요”라고 말해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기억은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는다는 것이 실수로 누군가의 무릎에 앉았고 그걸 계기로 한 사람과 사이가 발전한 기억은 말을 꺼내는 순간 더욱 선명해졌다.

가을은 구름이 높아지고 풍경의 여백도 선명해진다. 사물의 핏줄들이 보일 것만 같다. 투명하니까. 몸이 힘들면 기억도 힘들다. 기억은 몸을 넘나든다. 그래서 글을 쓰게 만든다. 기억의 일부를 도려낸 사람이 가을이 되니까, 자꾸 옛일이 떠오른다고 한다. 옛날은 가깝다. 몸에 배어 있다. 나는 오늘도 기어이 기억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