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민예원(27·스튜디오 파도나무)은 어릴 때도 아이돌 가수를 좋아한 적이 없다. K팝도 거의 안 들었다. 외국 록, 인디 음악에 심취했고 남들과 다른 음악을 듣고 싶었다. 대중음악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어느덧 재즈라는 역에 도착했다.

“다른 장르보다 깊이가 있었어요. 빠르게 빠져들었고, 지금도 여전히 재즈가 좋아요.” 그를 만난 건 지난달 19일. 한 독립출판사가 운영하는 카페에서다. 그곳에 그가 스케치한 재즈 연주자 드로잉 수십 점이 걸려 있었다. 한옥 건물 곳곳 창호지에 스며든 빛은 그림을 더 돋보이게 했다.
황홀경에 빠진 플루트 연주자…캔버스에 담긴 '재즈로운 몽상'
미술을 좋아했지만 안정적인 길을 가길 바라는 부모님 맘을 헤아려 미대엔 진학하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했고, 그리고 싶은 마음을 매주 학보에 삽화를 그리며 해소했다고. 지금 본업은 요가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그런 그가 전시하는 작품은 미술이나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정물 같은 정형화된 그림보다는 인물화 중에서도 움직이는 모습, 순간의 표정을 포착하는 게 예전부터 좋았어요. 재즈를 듣다 보니 연주자들 영상을 자주 보는데 그들이 연주할 때 황홀경에 빠지는 모습에 끌렸어요.”

그리기 도구는 단순했다. 연필, 구아슈 물감, 아크릴 물감. 디지털 도구를 쓸 때는 연필 질감이 나는 브러시를 쓴다. 색깔은 재즈의 블루스 느낌을 살려 검지만 오묘하게 푸른 감이 도는 색을 섞어 순식간에 칠해버린다고 했다. 그리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나를 통해 사람들이 재즈라는 음악을 궁금해하고, 들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재즈 일력을 기획해 출시했는데 그 계기로 이름이 알려져 이렇게 전시도 하게 됐네요.”

재즈 일력은 1년 365일에 맞춰 기본적인 365곡을 소개하는 캘린더로 2022년 처음 출시됐다. 일력 속 그림이든, 전시된 그림이든 그의 드로잉은 단 한 번의 수정도 없이 ‘일필휘지’로 그려내는 게 특징이다. “남을 의식하거나 확신이 없을 때 자꾸 수정하고 싶어지거든요. 그러면 선(線)이 탁해져요. 재즈 연주자도 마찬가지래요. 단단한 내면이 없으면 소리가 흔들린다고 하더라고요.”

그의 그림은 쳇 베이커, 아트 블래키,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전설적 연주자들의 초상화가 아니다. 수많은 얼굴이 겹친 드로잉이다. 작가는 연주자의 어떤 모습을 나타내고 싶었을까. “재즈를 연주할 때 뮤지션은 자신의 연주를 음악 흐름에 맡기고, 자기다운 모습을 드러내요. 정해진 코드 진행과 템포, 멜로디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에 빠져드는 모습을 잘 그렸을 때 가장 짜릿해요.”

인물화지만 정형화된 비율의 신체나 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연주하는 손은 크고 이목구비는 캐리커처에 가까워 그림을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는 이를 ‘재즈로운 몽상’이라고 이름 붙였다. 인생 재즈 곡을 추천해 달라는 말에 작가는 재즈 플루티스트 데이브 밸런틴의 ‘Pana Fuerte(Strong Friendship)’를 골랐다. “플루트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에서 아티스트만의 개성이 묻어나 정말 좋아해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천국에서 꼭 그분의 라이브를 듣고 싶어요.”

요즘 그는 무대 바로 옆에서 뮤지션과 상호작용하며 완성하는 드로잉에 재미를 붙였다. 올해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 V Space에서 열린 ‘2024 Rockin&Swingin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재즈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이들의 모습을 그렸다.

재즈 선율이 들려오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털썩 주저앉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