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날 움직이게 할까…춤과 존재에 대해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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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P와 함께 춤을' 리뷰
전설적 안무가 피나 바우슈
그가 남긴 '사후의 흔적' 탐색
AI로 생성된 '피나봇'과 대화
배우 본인의 이름 그대로 등장
자신의 서사 통해 공감 끌어내
바우슈가 남긴 예술적 유산
삶에 어떻게 발현되는지 표현
전설적 안무가 피나 바우슈
그가 남긴 '사후의 흔적' 탐색
AI로 생성된 '피나봇'과 대화
배우 본인의 이름 그대로 등장
자신의 서사 통해 공감 끌어내
바우슈가 남긴 예술적 유산
삶에 어떻게 발현되는지 표현
“나는 무용수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보다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피나 바우슈(1940~2009)의 이 유명한 말은 이후 수많은 예술가의 작업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연극 ‘P와 함께 춤을’은 이런 바우슈의 철학에 초점을 두고 그가 남긴 탄츠테아터(tanztheater)와 작업 방식, 태도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흐르고 있는지 탐색해 나간다. 공연은 크리에이티브 VaQi 이경성 연출가가 편지 형식의 글을 띄우면서 시작된다. 그 편지는 이미 이 세상에 ‘몸으로 존재하지 않는’ 바우슈에 대한 그리움과 그의 철학에 대한 경의, 그리고 ‘P와 함께 춤을’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배경을 담고 있다. ‘몸으로 존재하지 않는’ 바우슈는 챗GPT로 생성된 피나봇으로 이 연극에 함께했고, 우리는 그가 남긴 예술에 대한 태도와 작업 방식, 그의 정신적 세계의 집합체로 탄생한 피나봇을 통해 몸이 없이 정신으로, 탐구적 결과물로서 우리 곁에 남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연극과 춤의 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는 탄츠테아터 방식은 무용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다. 바우슈 이전의 무용 작품이 정해진 무용의 문법, 확장된 몸의 사용법을 통해 예술적 결과물로 내놓는 것이었다면, 바우슈 이후에는 일상의 움직임, 반복적 행위, 소리 지르기 등 내면에 감춰둔 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 위에 표출되고 무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연극은 바우슈가 이끌었던 부퍼탈 탄츠테아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용수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인터뷰와 작업 모습을 통해 바우슈 사후의 흔적을 탐색해 나간다. 직접 리허설과 공연을 참관한 ‘카네이션(Nelken)’을 중심에 두고, ‘풀문’ ‘카페 뮐러’ 등 바우슈의 주요 작품이 종종 연극 사이에 자취를 드러냈고, 정영두의 안무작 ‘제7 인간’도 언급된다.
연극의 전반부는 ‘피나와 나’, 이후는 ‘땅 딛기’라는 주제하에 출연자들이 각자의 경험을 꺼내놓으며 진행된다. 이 연극에는 배우, 무용수, 안무가, 연출가가 실제 본인의 이름과 상황 그대로 무대에 등장한다. 바우슈에 대한 연구서 성격을 띠면서도 출연자 개개인의 서사를 통해 깊은 공감을 끌어낸 점은 이 연극의 또 다른 매력이다. 출연자들의 서사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몸과 춤의 거리와 춤과 말의 거리를 재고, 춤과 연극의 경계가 무의미함을 느끼다가, 연극과 삶의 거리를 떠올리고, 연극이 끝날 무렵에는 바우슈의 철학뿐 아니라 그들 중 누군가의 삶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연극은 ‘영향력이 지대했던 한 예술가의 사후에 그가 남긴 문화예술적 유산은 어떻게 창조적으로 이어져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됐지만, 그 방식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그 유산이 어떤 식으로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발현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것을 남기고 싶은지에 대해 출연자들이 남긴 마지막 몇 마디는 이 연극의 의미를 진솔하게 전한다. 27년을 한국 땅에 살면서도 ‘우와’라는 감탄사보다 ‘와우’라는 감탄사를 내뱉길 강요받는 사회적 시선에 노출돼 온 배우가 여전히 이방인인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는 동안 존재감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배우를 통해서는 이번 연극을 올리면서 수없이 쓰고 지우고 뱉고 사라진, 최종적으로 연극 안에 남지 못한 흔적들을 생각한다. 그것은 남겨지지 않은 것으로 이 연극 안에 남겨졌다. 그리고 바우슈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춤 안에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제 막 무대 뒤로 나간 배우들의 목소리와 행적이 담긴 릴데크의 테이프가 돌아가는 가운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흐른다. 바우슈의 ‘봄의 제전’에서 무대 바닥 흙더미 위로 움직이던 무용수의 몸에 그 시간이 고스란히 남은 것처럼 바우슈의 흔적을 그 소리 안에서 찾아본다. 조금 전까지 무대를 누비며 현존하던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이제 과거가 됐다. 연출가는 테이프를 돌려 과거를 현재로 재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를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된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할까. 무엇이 나를 존재하게 할까.
이단비 무용칼럼니스트
피나 바우슈(1940~2009)의 이 유명한 말은 이후 수많은 예술가의 작업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연극 ‘P와 함께 춤을’은 이런 바우슈의 철학에 초점을 두고 그가 남긴 탄츠테아터(tanztheater)와 작업 방식, 태도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흐르고 있는지 탐색해 나간다. 공연은 크리에이티브 VaQi 이경성 연출가가 편지 형식의 글을 띄우면서 시작된다. 그 편지는 이미 이 세상에 ‘몸으로 존재하지 않는’ 바우슈에 대한 그리움과 그의 철학에 대한 경의, 그리고 ‘P와 함께 춤을’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배경을 담고 있다. ‘몸으로 존재하지 않는’ 바우슈는 챗GPT로 생성된 피나봇으로 이 연극에 함께했고, 우리는 그가 남긴 예술에 대한 태도와 작업 방식, 그의 정신적 세계의 집합체로 탄생한 피나봇을 통해 몸이 없이 정신으로, 탐구적 결과물로서 우리 곁에 남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연극과 춤의 결합으로 설명할 수 있는 탄츠테아터 방식은 무용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다. 바우슈 이전의 무용 작품이 정해진 무용의 문법, 확장된 몸의 사용법을 통해 예술적 결과물로 내놓는 것이었다면, 바우슈 이후에는 일상의 움직임, 반복적 행위, 소리 지르기 등 내면에 감춰둔 것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 위에 표출되고 무용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연극은 바우슈가 이끌었던 부퍼탈 탄츠테아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용수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인터뷰와 작업 모습을 통해 바우슈 사후의 흔적을 탐색해 나간다. 직접 리허설과 공연을 참관한 ‘카네이션(Nelken)’을 중심에 두고, ‘풀문’ ‘카페 뮐러’ 등 바우슈의 주요 작품이 종종 연극 사이에 자취를 드러냈고, 정영두의 안무작 ‘제7 인간’도 언급된다.
연극의 전반부는 ‘피나와 나’, 이후는 ‘땅 딛기’라는 주제하에 출연자들이 각자의 경험을 꺼내놓으며 진행된다. 이 연극에는 배우, 무용수, 안무가, 연출가가 실제 본인의 이름과 상황 그대로 무대에 등장한다. 바우슈에 대한 연구서 성격을 띠면서도 출연자 개개인의 서사를 통해 깊은 공감을 끌어낸 점은 이 연극의 또 다른 매력이다. 출연자들의 서사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몸과 춤의 거리와 춤과 말의 거리를 재고, 춤과 연극의 경계가 무의미함을 느끼다가, 연극과 삶의 거리를 떠올리고, 연극이 끝날 무렵에는 바우슈의 철학뿐 아니라 그들 중 누군가의 삶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연극은 ‘영향력이 지대했던 한 예술가의 사후에 그가 남긴 문화예술적 유산은 어떻게 창조적으로 이어져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됐지만, 그 방식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그 유산이 어떤 식으로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발현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것을 남기고 싶은지에 대해 출연자들이 남긴 마지막 몇 마디는 이 연극의 의미를 진솔하게 전한다. 27년을 한국 땅에 살면서도 ‘우와’라는 감탄사보다 ‘와우’라는 감탄사를 내뱉길 강요받는 사회적 시선에 노출돼 온 배우가 여전히 이방인인 자신의 입장을 토로하는 동안 존재감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배우를 통해서는 이번 연극을 올리면서 수없이 쓰고 지우고 뱉고 사라진, 최종적으로 연극 안에 남지 못한 흔적들을 생각한다. 그것은 남겨지지 않은 것으로 이 연극 안에 남겨졌다. 그리고 바우슈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춤 안에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제 막 무대 뒤로 나간 배우들의 목소리와 행적이 담긴 릴데크의 테이프가 돌아가는 가운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흐른다. 바우슈의 ‘봄의 제전’에서 무대 바닥 흙더미 위로 움직이던 무용수의 몸에 그 시간이 고스란히 남은 것처럼 바우슈의 흔적을 그 소리 안에서 찾아본다. 조금 전까지 무대를 누비며 현존하던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이제 과거가 됐다. 연출가는 테이프를 돌려 과거를 현재로 재생한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를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된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할까. 무엇이 나를 존재하게 할까.
이단비 무용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