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수>를 보고 읽고 들으며 화합의 대한민국을 생각해 본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조원경의 책 경제 그리고 삶
소설 <상록수>의 희망가
소설 <상록수>의 희망가
안산 상록수역을 찾았다. 상록수역인데 상록수가 없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것과 같은 원리인가? 상록수의 모델은 최용신이란 실제 인물과 관계한다. 소설 속의 청석골은 샘골 마을과 비교할 수 있다. 샘골 마을이 훗날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해 상록수 마을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최용신 여사는 개발 협력의 정신을 일찍이 깨우친 분이다.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가 필요한데 가난이 주는 훈련, 어진 어머니의 교육,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 위인의 전기에 고무된 스스로의 분발이 그 내용이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사회계몽 운동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최용신 분의 선각자적 사고는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안산 샘골교회로 가면 최용신 여사가 직접 심은 상록수가 있다. 1934년 4월 10일 최용신은 자신의 기도문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행복을 위해, 사회 안정을 위해, 세계평화를 위해 나아가자”라는 글을 남기며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었다. 문맹 퇴치와 여성의 지위 향상, 농촌 아동들의 교육과 야학을 통한 문맹 타파, 농촌 생활 개선에 힘쓰며 최용신은 소설 <상록수>의 채영신으로 부활해 기억되고 있다.
샘골 교회의 상록수를 보며 소설 상록수를 생각한다. 문맹 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의 대명사인 소설 상록수는 늘 우리에게 과거를 돌이켜 보고 앞으로의 삶을 개척하는 선구자 정신을 떠오르게 한다. 소설의 줄거리를 양희은의 노래 상록수를 부르며 떠올려 본다.
고등농림학교 학생인 박동혁과 여자 신학교에 다니는 채영신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한 신문사가 주관한 농촌계몽운동에 참가했다가 첫눈에 서로 호감을 가진다. 영신을 총애하는 백현경 여사의 토요간담회에서 재회한 둘은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뜻이 같음을 확인하고 동지가 된다.
그 후 동혁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인 한곡리로 내려가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 건강이 나빠져서 한곡리를 방문하고 싶다는 영신의 편지를 받는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후한 인심, 동혁과 농우회 동지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건강을 회복한다. 영신이 한곡리를 떠나기 전날 밤, 동혁과 영신은 바닷가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농촌운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는 3년 후에 결혼하기로 약속한다. 이후 동혁은 다양한 사업을 실시하고 농우회 회관까지 건립한다.
청석골로 간 영신은 부녀회를 조직하고 마을 예배당을 빌려 어린이를 위한 강습소를 운영한다. 드디어 청석학원의 문패가 걸리는 날, 영신은 인사말을 하는 도중 쓰러지고 만다. 맹장 수술을 받은 영신은 동혁의 간호로 몸을 점점 회복해 가고, 둘은 함께 문화계몽 운동에서 나아가 생활개혁운동을 하자고 다짐한다.
그러던 중 동혁은 동생 동화의 급한 편지를 받고 한곡리로 달려간다. 죽마고우였던 건배가 고리대금업자 강기천의 꾐에 빠져 동혁을 배신하고 강기천의 편에 선 것이다. 결국 강기천은 농우회의 회장 자리에 오르고 그의 뜻대로 농민회관을 진흥회 회관으로 바꾼다. 동생 동화는 울분으로 회관에 불을 지르고, 동혁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잡혀간다. 동혁이 형무소에 있는 사이 영신은 기독교계의 추천으로 도일해서 공부한다. 그녀는 타국에서 고향과 동혁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으로 몸이 점점 약해진다.
영신이 다시 청석골로 돌아왔을 때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만 각기병과 맹장염의 재발로 숨지고 만다. 영신은 눈을 감기 전 사랑하는 동혁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영문도 모른 채 출소한 동혁은 영신의 비보를 듣고 청석골로 달려가 관을 부여잡고 통곡한다.
그는 영신의 무덤에서 영신의 몫까지 두 배로 농민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한다. 동혁은 고향 친구 건배를 찾아가 강기천이 급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건배에게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 같이 일할 것을 제의한다. 두 사람은 농촌을 지키기로 굳게 약속한다. 잠시 눈을 감고 소설의 남자 주인공 박동혁을 떠올려 본다. 영신의 죽음을 슬퍼하던 그가 불그스름하게 물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상록수를 바라보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기나긴 겨울의 눈바람을 맞았으면서도 여전히 싱싱한 자태를 뽐내고 있던 상록수다.
가요 <상록수>는 1975년 금지곡으로 정해졌다. 대한민국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을 은유하는 가사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1988년에 가서야 금지가 풀렸다. <상록수>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는 민주화를 염원하는 젊은이들을 집결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노래를 들으며 동혁이 영신과 펼쳤던 러브스토리와 농촌계몽운동을 생각해 본다. 둘의 노력과 의지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청년 학생들이 전개한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의 ‘민중 속으로’라는 취지에 맞게 3.1 운동 후 민족 내부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자성에서 농촌에 퍼진다.
한국형 브나르도 운동은 1933년 계몽운동으로 이름이 바뀐 뒤 배우고 땀 흘려 빈곤에서 벗어나자는 농촌의 의식개혁운동으로서 범위를 넓혀 간다. 1930년대 초반 심훈의 <상록수>가 탄생한 배경이 바로 이 브나로드 운동이다. 진보의 노래 <상록수>도, 소설 <상록수>의 정신과 얼을 계승한 보수의 새마을운동도 모두 소중한 역사다. 농민들의 자립을 장려하고 황폐해진 농촌의 경제 상황을 개선하자는 호소에 누가 반대 할 수 있을까?
정치적 색채는 배제하고 민중의 삶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상록수 프로젝트의 의의를 우리는 찾아야 한다. 보수와 진보가 만나 더 나은 대한민국으로 거듭나는 꿈을 꾼다. 설움이 가시고 상록수가 가득한 아침 동산에 올라 하나 된 대한민국을 불러 보는 상상을 한다. 우리는 가난했다. 지금은 부유한 나라가 되었으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문득 소설 상록수처럼 가난한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생각해 본다.
국제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많은 나라에 말라리아 예방책으로 모기장을 제공한 적이 있다. 많은 나라들이 국제 ODA 자금을 제공했지만, 일부는 의도적으로 UN에서의 표를 의식하고 정치적 색채를 내포하면서 지원하기도 했다. 각 나라로부터 엄청난 양의 모기장이 아프리카로 건네졌다. 문제는 모기장이 최종 수요자에게 가서 고기잡이 그물로 둔갑하거나 몇 안 되는 실제 모기장을 생산하는 아프리카 지역 기업을 도산하게 한 것이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모기장을 줄 것이 아니라 모기장을 만드는 방법을 제대로 전수 했다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막대한 돈을 부어도 아프리카가 가난으로부터 해방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원조의 많은 부분이 아프리카 대륙의 개발 성과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서구의 입맛에 맞는 이런저런 유형의 정권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만 쓰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원조의 대부분이 부채 탕감에 사용되고 수원국의 산업 기반 강화나 사회 인프라 구축 등 발전적 원조에는 제대로 쓰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조로 산업을 일군 한국의 모범적인 사례와 비교할 때,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를‘원조의 저주’에 빠져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서방국가들의 원조가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다고 주장하며 저주 내지 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질적으로 원조가 국민들을 위해 쓰이기보다는 독재자들의 재산 증식과 정권 연장을 위해 사용된다는 시각도 있다. 국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충족시키기 위한 일을 하기보다는 허울 좋은 대규모 사업을 벌인 뒤 그 돈을 뒤로 빼돌려 자신들 주머니를 두둑이 채우고 있다는 비난도 있다. 물론 이는 원조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990년 6,602달러에서 1994년 1만 달러, 2006년 2만 달러, 2017년 3만 달러를 넘어섰다. 지난해는 3만6194달러였다. 그런데도 극빈층은 줄지 않고 그들의 생활에도 나아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우리 사회의 계층 이동 경직성과 양극화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함께 잘 살고자 하는 채영신과 박동혁의 정신이 더욱 새롭다. 상록수 노래를 더 힘차게 부르며 더 나은 대한민국을 그려 본다.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가 필요한데 가난이 주는 훈련, 어진 어머니의 교육,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 위인의 전기에 고무된 스스로의 분발이 그 내용이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사회계몽 운동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최용신 분의 선각자적 사고는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안산 샘골교회로 가면 최용신 여사가 직접 심은 상록수가 있다. 1934년 4월 10일 최용신은 자신의 기도문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행복을 위해, 사회 안정을 위해, 세계평화를 위해 나아가자”라는 글을 남기며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었다. 문맹 퇴치와 여성의 지위 향상, 농촌 아동들의 교육과 야학을 통한 문맹 타파, 농촌 생활 개선에 힘쓰며 최용신은 소설 <상록수>의 채영신으로 부활해 기억되고 있다.
샘골 교회의 상록수를 보며 소설 상록수를 생각한다. 문맹 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의 대명사인 소설 상록수는 늘 우리에게 과거를 돌이켜 보고 앞으로의 삶을 개척하는 선구자 정신을 떠오르게 한다. 소설의 줄거리를 양희은의 노래 상록수를 부르며 떠올려 본다.
고등농림학교 학생인 박동혁과 여자 신학교에 다니는 채영신은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한 신문사가 주관한 농촌계몽운동에 참가했다가 첫눈에 서로 호감을 가진다. 영신을 총애하는 백현경 여사의 토요간담회에서 재회한 둘은 농촌계몽운동에 대한 뜻이 같음을 확인하고 동지가 된다.
그 후 동혁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인 한곡리로 내려가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 건강이 나빠져서 한곡리를 방문하고 싶다는 영신의 편지를 받는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후한 인심, 동혁과 농우회 동지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건강을 회복한다. 영신이 한곡리를 떠나기 전날 밤, 동혁과 영신은 바닷가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농촌운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는 3년 후에 결혼하기로 약속한다. 이후 동혁은 다양한 사업을 실시하고 농우회 회관까지 건립한다.
청석골로 간 영신은 부녀회를 조직하고 마을 예배당을 빌려 어린이를 위한 강습소를 운영한다. 드디어 청석학원의 문패가 걸리는 날, 영신은 인사말을 하는 도중 쓰러지고 만다. 맹장 수술을 받은 영신은 동혁의 간호로 몸을 점점 회복해 가고, 둘은 함께 문화계몽 운동에서 나아가 생활개혁운동을 하자고 다짐한다.
그러던 중 동혁은 동생 동화의 급한 편지를 받고 한곡리로 달려간다. 죽마고우였던 건배가 고리대금업자 강기천의 꾐에 빠져 동혁을 배신하고 강기천의 편에 선 것이다. 결국 강기천은 농우회의 회장 자리에 오르고 그의 뜻대로 농민회관을 진흥회 회관으로 바꾼다. 동생 동화는 울분으로 회관에 불을 지르고, 동혁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잡혀간다. 동혁이 형무소에 있는 사이 영신은 기독교계의 추천으로 도일해서 공부한다. 그녀는 타국에서 고향과 동혁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으로 몸이 점점 약해진다.
영신이 다시 청석골로 돌아왔을 때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만 각기병과 맹장염의 재발로 숨지고 만다. 영신은 눈을 감기 전 사랑하는 동혁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영문도 모른 채 출소한 동혁은 영신의 비보를 듣고 청석골로 달려가 관을 부여잡고 통곡한다.
그는 영신의 무덤에서 영신의 몫까지 두 배로 농민을 위해 살 것을 다짐한다. 동혁은 고향 친구 건배를 찾아가 강기천이 급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건배에게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 같이 일할 것을 제의한다. 두 사람은 농촌을 지키기로 굳게 약속한다. 잠시 눈을 감고 소설의 남자 주인공 박동혁을 떠올려 본다. 영신의 죽음을 슬퍼하던 그가 불그스름하게 물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상록수를 바라보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기나긴 겨울의 눈바람을 맞았으면서도 여전히 싱싱한 자태를 뽐내고 있던 상록수다.
가요 <상록수>는 1975년 금지곡으로 정해졌다. 대한민국의 억압적인 정치 상황을 은유하는 가사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1988년에 가서야 금지가 풀렸다. <상록수>의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는 민주화를 염원하는 젊은이들을 집결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노래를 들으며 동혁이 영신과 펼쳤던 러브스토리와 농촌계몽운동을 생각해 본다. 둘의 노력과 의지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청년 학생들이 전개한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의 ‘민중 속으로’라는 취지에 맞게 3.1 운동 후 민족 내부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자성에서 농촌에 퍼진다.
한국형 브나르도 운동은 1933년 계몽운동으로 이름이 바뀐 뒤 배우고 땀 흘려 빈곤에서 벗어나자는 농촌의 의식개혁운동으로서 범위를 넓혀 간다. 1930년대 초반 심훈의 <상록수>가 탄생한 배경이 바로 이 브나로드 운동이다. 진보의 노래 <상록수>도, 소설 <상록수>의 정신과 얼을 계승한 보수의 새마을운동도 모두 소중한 역사다. 농민들의 자립을 장려하고 황폐해진 농촌의 경제 상황을 개선하자는 호소에 누가 반대 할 수 있을까?
정치적 색채는 배제하고 민중의 삶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상록수 프로젝트의 의의를 우리는 찾아야 한다. 보수와 진보가 만나 더 나은 대한민국으로 거듭나는 꿈을 꾼다. 설움이 가시고 상록수가 가득한 아침 동산에 올라 하나 된 대한민국을 불러 보는 상상을 한다. 우리는 가난했다. 지금은 부유한 나라가 되었으나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문득 소설 상록수처럼 가난한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생각해 본다.
국제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많은 나라에 말라리아 예방책으로 모기장을 제공한 적이 있다. 많은 나라들이 국제 ODA 자금을 제공했지만, 일부는 의도적으로 UN에서의 표를 의식하고 정치적 색채를 내포하면서 지원하기도 했다. 각 나라로부터 엄청난 양의 모기장이 아프리카로 건네졌다. 문제는 모기장이 최종 수요자에게 가서 고기잡이 그물로 둔갑하거나 몇 안 되는 실제 모기장을 생산하는 아프리카 지역 기업을 도산하게 한 것이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모기장을 줄 것이 아니라 모기장을 만드는 방법을 제대로 전수 했다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막대한 돈을 부어도 아프리카가 가난으로부터 해방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원조의 많은 부분이 아프리카 대륙의 개발 성과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서구의 입맛에 맞는 이런저런 유형의 정권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만 쓰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원조의 대부분이 부채 탕감에 사용되고 수원국의 산업 기반 강화나 사회 인프라 구축 등 발전적 원조에는 제대로 쓰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원조로 산업을 일군 한국의 모범적인 사례와 비교할 때,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를‘원조의 저주’에 빠져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서방국가들의 원조가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다고 주장하며 저주 내지 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실질적으로 원조가 국민들을 위해 쓰이기보다는 독재자들의 재산 증식과 정권 연장을 위해 사용된다는 시각도 있다. 국민들의 기본적인 삶을 충족시키기 위한 일을 하기보다는 허울 좋은 대규모 사업을 벌인 뒤 그 돈을 뒤로 빼돌려 자신들 주머니를 두둑이 채우고 있다는 비난도 있다. 물론 이는 원조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990년 6,602달러에서 1994년 1만 달러, 2006년 2만 달러, 2017년 3만 달러를 넘어섰다. 지난해는 3만6194달러였다. 그런데도 극빈층은 줄지 않고 그들의 생활에도 나아짐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우리 사회의 계층 이동 경직성과 양극화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럴수록 함께 잘 살고자 하는 채영신과 박동혁의 정신이 더욱 새롭다. 상록수 노래를 더 힘차게 부르며 더 나은 대한민국을 그려 본다.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조원경 UNIST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