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21회째를 맞은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지난 4일 이틀 일정으로 개막했다. 올해 개막작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였다. 이 작품이 국내 무대에 오른건 1996년 서울시오페라단의 국내 초연 이후 28년만이다.

대구오페라하우스의 오페라 제작 노하우는 한국 최고를 넘어 세계적인 수준에 달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지난해 개·폐막작으로 선보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와 <엘렉트라>에 이어 올해 <장미의 기사>까지 슈트라우스의 3대 오페라를 직접 제작했다. 더욱 주목할 점은 주인공만 해외에서 초청하고 조역과 단역만 국내 성악가로 구색만 맞춰오던 국내 오페라계 관행을 따르지 않고 한국인으로만 A,B팀 성악가를 캐스팅해 공연을 만들어낸 것이다.
독일 오페라의 자존심, 유럽판 함진아비 이야기 <장미의 기사>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는 세명의 여성 성악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소프라노가 노래하는 마샬린과 소피, 메조소프라노가 맡는 옥타비안이다. 슈트라우스는 3막의 3중창을 염두에 두고 세 명의 성부가 겹치지 않게 오페라를 작곡했다. 리릭 소프라노가 부르는 마샬린은 이 작품을 통틀어 가장 계급이 높은 등장인물로 '행진'을 뜻하는 마쉬를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군사령관(마샬)의 부인'이다. 극중 대사로 소개되는 마샬린의 본명 '마리 테레스'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과 비슷하다. 콜로라투라가 노래하는 소피는 13~15세 가량의 소녀로 은장미를 들고 온 '장미의 기사' 와 사랑에 빠지는 순수한 역할이다.

작품의 타이틀롤 '장미의 기사' 옥타비안은 17세의 백작으로 그려졌는데 대부분의 오페라에서 소프라노가 주인공을 맡는 것과 달리 메조소프라노에게 허락된 흔치 않은 주인공 역할이다. 이 외에도 메조소프라노가 주인공을 맡는 역할로는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의 오를로프스키 왕자가 있는데 이들을 통틀어 독일 오페라의 3대 '호젠 롤레(여성이 바지 입는 역할)'라고 한다.
독일 오페라의 자존심, 유럽판 함진아비 이야기 <장미의 기사>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제작한 오페라 <장미의 기사>는 한국 오페라 역사에 남을만한 웰메이드 작품이었다. 로비에서 만난 연출자 조란 토도로비치는 "등장인물의 감정에 따라 무대에 색을 입혔다"라며 "대사가 많아 청각에만 집중되기 쉬운 독일어 오페라에 시각효과를 입혀 작품성을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1막에서 마샬린의 감정에 따라 샹들리에의 밝기가 변하며 극중 주인공의 감정이 관객에게 시청각을 통해 전달되었다. 2막의 소피와 옥타비안이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는 회색 꽃봉오리 무대장치에 장밋빛이 스며들며 은은한 사랑의 감정이 표현됐다. 3막에서는 과감히 샹들리에를 걷어내고 촛불을 소품으로 사용해 계단무대에서 내려오는 마샬린의 등장신이 마치 신전에서 여신이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독일 오페라의 자존심, 유럽판 함진아비 이야기 <장미의 기사>
출연한 성악가들은 모두 해외 극장의 프로덕션과 비교해도 손색 없는 호연을 보여줬다. 마샬린 역의 소프라노 조지영은 기품 있는 연기로 역할을 잘 소화했다. 이탈리안 테너 역의 김효종은 미성을 뽐내며 어려운 기교의 아리아를 무리 없이 불러냈다. 4일 출연한 옥타비안 역 메조소프라노 김선정은 잘생긴 백작 역의 성악가가 여성이라는것을 잠시 망각하게 할 정도의 호연을 선보이며 1인 2역을 훌륭히 해냈다. 소피 역의 소프라노 이혜정은 깨끗하고 맑은 고음으로 15세 소녀 소피를 노래했고 5일 공연의 소피 박소영도 시원한 고음으로 노래했다. 파니날을 노래한 바리톤 정제학은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되는 성악가였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은건 옥스 남작 역의 베이스 박기현이다. 독일 할레 오페라극장의 종신 성악가 박기현은 이번 공연이 12번째 옥스 역 출연이라고 밝혔다. 세계적으로도 품귀 현상인 '옥스'역을 소화할 수 있는 한국 성악가가 있다는 건 국내 오페라계 큰 자산이다. 옥스 남작이 애드립으로 "아 그래 맞나?", "고마 치아뿌라" 같은 대구 사투리를 할때마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가지 아쉬운건 지휘자 에반 알렉시스 크리스트가 책임을 맡은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슈트라우스의 작품 속 호른 파트는 어렵기로 유명한데 궁정 호른 주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수준 높은 호른 연주만을 들으며 성장한 까닭이다. 이날 반주를 맡은 디오 오케스트라는 최선을 다해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연주해냈지만 서곡을 연주한 후 호른 연주자의 입술이 굳어버린 데서 오는 실수가 연발됐다. 공연이 계속되면서 호른 사운드도 안정감을 되찾았는데 이는 연주자의 컨디션을 무시한 채 서곡의 템포를 빠르게만 연주해 생긴 사고다.
독일 오페라의 자존심, 유럽판 함진아비 이야기 <장미의 기사>
오페라애호가들을 위한 풍성한 잔치는 계속된다. 국립오페라단이 제작하는 리하르트 바그너 오페라<탄호이저>, 대전예술의전당이 제작하는 베르디의 <운명의 힘>에 이어 아레나의 <투란도트>와 서울시오페라단의 <라 보엠>도 계속된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로 화려한 개막을 알린 대구국제오페라 축제는 오는 11일 비발디의 바로크 오페라 <광란의 오를란도>를 한국 초연한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