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협력으로 빚어낸 '소버린 테크'…세계 공급망 '핵심 키' 된다
주요 선진국은 미·중 패권 전쟁에 휘둘리지 않을 ‘소버린 테크’를 창안하고, 이를 사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소버린 테크의 핵심 요소로 ‘개방’과 ‘협력’을 꼽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ASML보다 더 나은 광학기술을 보유했던 일본 기업들은 폐쇄적이고 순혈주의를 고수하는 개발 방식인 ‘지마에슈기(じまえしゅぎ)’에 매달렸다.

단적인 예로 ASML 연구논문 저자는 대부분 다수 기관 소속이지만, 캐논토키와 니콘의 논문 저자는 거의 내부 연구원으로만 구성됐다. 크리스토퍼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가 “교류와 협력, 공동 연구는 ASML의 정체성”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영국은 합성생물학을 소버린 테크로 키우고 있다. 1950년대 DNA 구조를 발견한 프랜시스 크릭을 배출한 영국은 70여 년이 흐른 지금, DNA 구조 읽기와 쓰기를 넘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내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공대로 손꼽히는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이 운영하는 런던DNA파운드리는 단 하루 만에 서로 다른 유전자 1만5000개를 설계하고 시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임페리얼칼리지의 거대한 네트워크다. 메리 라이언 임페리얼칼리지 부총장은 “과학과 혁신은 전 세계적인 도전”이라며 “임페리얼칼리지는 재능 있는 사람을 데려와 학제 간으로 협력하는 팀을 꾸리는 데 탁월한 대학”이라고 했다.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의 ‘수소 동맹’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스웨덴은 석탄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해 철강을 생산하는 수소환원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등 수소 생태계 전반을 북부 노르보텐 지역에 조성 중이다. 핀란드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열을 난방 에너지로 활용하는 발상 전환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배터리를 제조하지는 않지만 전기차 배터리를 수거해 재활용하는 데도 가장 앞선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순환 테크’의 선두 주자다. 북유럽 국가는 이처럼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수소 생태계 구축에선 국가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든다. 일국만으로는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을 누빈 이번 취재 현장에서 절감한 것은 소버린 테크가 나오려면 과감한 규제 혁파가 필수라는 사실이다. 스위스가 대표적이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는 뇌과학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스위스의 브레인컴퓨팅(BCI) 스타트업들은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이 DNA 합성이라는 도전에 과감히 나선 건 역설적이게도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한 이후다.

바이오 정보와 관련한 EU의 견고한 규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지면서 합성생물학 분야에서 미·중의 아성을 뛰어넘고 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