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남동쪽으로 1시간40분을 달리면 펠트호번이다. 초행자의 눈엔 한가한 전원 마을 같은 이곳은 미·중 ‘칩 워(Chip War)’의 핵심 전장이다. ASML 본사가 있어서다.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시장을 주름잡는 대만 TSMC조차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High-NA EUV’ 앞에선 ‘고객 중 하나’일 뿐이다.
< 나노 넘어 옹스트롬 시대로 > 최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인 High-NA 극자외선(EUV)에 들어가는 자이스의 리소그래피용 투영 광학기기. 나노의 10분의 1인 옹스트롬 시대를 열기 위한 핵심 열쇠다. /ASML 제공
< 나노 넘어 옹스트롬 시대로 > 최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인 High-NA 극자외선(EUV)에 들어가는 자이스의 리소그래피용 투영 광학기기. 나노의 10분의 1인 옹스트롬 시대를 열기 위한 핵심 열쇠다. /ASML 제공
아직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남아 있던 9월 초, 한국 언론 최초로 ASML 캠퍼스에 발을 디뎌 크리스토퍼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를 만났다. 이곳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해 웨이저자 TSMC CEO 등 극소수의 ‘반도체 거인’만 방문록에 서명을 남길 수 있는 곳이다. 서울대 공대와 함께 올해로 세 번째 ‘퓨처테크 현장을 가다’ 기획시리즈를 연재하는 한국경제신문은 3년 동안 ASML을 설득한 끝에 이곳에 취재진을 들여보낼 수 있었다. ‘삼고초려’ 끝의 성과다.

본사 1층에서 철저한 신분 확인 과정을 거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특허의 벽’이 눈에 띄었다. ASML 기술의 역사를 집약해 놓은 공간이다. 켈시 지거스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는 “기술을 개발한 엔지니어에게 존경심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ASML이 보유한 특허는 2020년 1만3500개, 2021년 1만5000개, 2022년 1만6000개, 지난해 1만7000개를 돌파했다. 기자의 눈엔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자신감으로 읽혔다. High-NA EUV는 중국과 기술·무역전쟁을 벌이는 미국이 대중 수출을 엄금한 반도체 장비다. 중국엔 ‘통곡의 벽’인 셈이다.

ASML은 High-NA EUV로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할 작정이다. High-NA EUV가 없으면 파운드리 미래로 불리는 3나노미터(㎚·1㎚=10억분의 1m) 공정에 진입할 수 없다. 삼성전자와 TSMC가 이 장비를 한 대라도 더 구매하려는 이유다. 푸케 CEO는 “High-NA EUV의 광학 시스템은 빠른 속도의 광원을 나노 단위의 정확도로 조절할 수 있다”며 “전체 시스템은 진공 상태여야 하고 극도로 청결해야 하는 데다 온도를 0.005도까지 미세 제어해야 할 정도의 기술을 적용했다”고 강조했다.

High-NA EUV는 나노를 넘어 최초로 옹스트롬(ngstrm) 시대를 여는 ‘꿈의 장비’가 될 전망이다. 1나노를 또다시 10분의 1로 줄인 옹스트롬 단위로 실리콘 기판 위에 초미세 회로를 그릴 수 있다는 의미다. 네덜란드를 비롯해 독일 스위스 등 유럽 정밀 광학의 축적이라고 할 수 있는 ASML의 기술력이 또 다른 반도체 역사를 쓸 것으로 예상된다.

미·중 패권 전쟁이 심연으로 빠지더라도 EUV 노광 장비라는 ‘소버린 테크’를 보유한 네덜란드는 양쪽 진영에서 모두 ‘러브콜’을 받는 나라로 남을 것이란 얘기다.

펠트호번=강경주/박동휘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