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롤모델 찾기 힘든 K스타트업
“한국에 뛰어난 인재가 많은데도 정작 창업으로 크게 성공하는 사례가 적은 이유는 ‘롤모델’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미국 시애틀에서 만난 한 국내 스타트업 대표는 “공대생들이 ‘실리콘밸리에서 국내 스타트업이 거액의 투자를 받았다’ ‘한 창업가가 기업을 빅테크에 1조원 받고 매각했다’는 등의 소식을 계속해서 접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창업 동기 부여”라며 이같이 말했다. 자신이 대학 시절 창업의 꿈을 키울 수 있게 해준 쿠팡의 성공 같은 사례가 더 나와야 한다고도 했다.

VC 활성화가 급선무

최근 글로벌 산업 주도권을 잡은 인공지능(AI) 시장은 스타트업이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챗GPT 개발사 오픈AI는 66억달러(약 8조8000억원)의 신규 투자금을 유치했다. 글로벌 비상장 기업 중 역대 최대 규모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생소한 스타트업이던 오픈AI의 기업가치는 이제 1570억달러(약 207조원)에 달한다. 미국의 통신 재벌 AT&T에 맞먹는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이야기가 달라진다. 과거 수많은 국내 스타트업이 유통·금융·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을 앞세워 기존 기업을 위협하는 자리에 올랐지만, AI 분야에서는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정보기술(IT) 최강국’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원인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스타트업 전문 연구기관 스타트업게놈이 최근 발간한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 보고서(GSER)’에서 서울은 세계 주요 도시 중 9위를 차지하며 지난해에 비해 세 계단 올랐다. 정부의 정책자금 지원이 적은 것도 아니다. 해당 보고서도 서울의 스타트업 생태계 순위가 오른 배경으로 한국 정부와 서울시의 막대한 정책자금 지원을 꼽고 있다.

'더하기'보다는 '빼기' 해야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많은 국내 스타트업은 벤처캐피털(VC) 시장의 활성화가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국내에서도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많은 창업가가 뛰어들고 있는 AI는 다른 분야에 비해 초기 투자 비용이 압도적으로 많이 든다. 정부의 정책자금 투입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국내 스타트업이 초기 창업 지원의 상당수를 정부 정책자금에 의존하는 것이 사실이다.

실리콘밸리가 글로벌 스타트업의 성지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엔 VC가 있다. 후배 스타트업의 귀감이 될 수 있는 ‘한국의 오픈AI’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각 기업의 생애주기에 맞춰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명문 VC를 늘리는 데 더욱 집중해야 한다. 좋은 VC가 늘어나면 좋은 스타트업도 따라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곳곳의 기업 주도형 벤처캐피털(CVC)과 사모펀드(PEF)의 발목을 잡는 규제부터 손봐야 한다.

지난 2일 만난 맷 가먼 아마존웹서비스(AWS)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생태계를 가진 나라”라고 평가했다. 한국은 세계 굴지의 반도체 기업을 보유한 나라다. 여기에 롤모델이 되는 스타트업까지 키워낸다면 AI 시대에 걸맞은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게 된다. 무작정 정책자금 규모를 늘리기보다 창업 시장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규제를 빼는 데 집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