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혁신의 삼성' 가로막는 관료주의
국민이 삼성그룹을 걱정하고 있다.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삼성은 그동안 혁신의 아이콘이었으며, 합리적이고 치밀한 관리의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오너의 비전과 전문경영인의 역량이 버무려져 혁신과 관리의 날줄과 씨줄을 정교하게 짰으니 ‘반도체 제국’의 신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삼성의 위기가 국가의 어려움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는 데 주목해 본다.

첫째, 관료제적 조직문화가 기승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관료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강대하다. 개인은 충성스럽고, 기민하며, 합리적일 수 있지만 집단으로서 관료제는 극도로 이기적이며 소극적이고, 교활하다. 삼성에서도 비슷한 관료제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느껴진다. 사일로(칸막이)로 회사 차원의 임무는 모른 척하고, 보신을 위한 소극적인 의사결정이 팽배해 있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보고가 위로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 결과는 원인을 찾기 힘든 비효율과 저성과 그리고 각종 사건·사고다. 직원들은 엉뚱한 허수아비를 사건·사고의 원인으로 주워섬기면서 겁줄 것이고, 회피적이고 무사안일한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다. 오너가 여기에 흔들리면 안 된다. 마치 대통령이나 장관이 국·과장급 수준의 세계관을 보이는 것과 같아지는 꼴이다.

둘째, 자기 성공에 도취했다. 삼성의 성공은 혁신과 관리의 절묘한 조화인데, 점점 ‘관리의 삼성’만 부각됐다. 그 결과 관리의 삼성 때문에 삼성이 망할 것이라는 내부 한탄이 많다.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정부 관료제는 절대로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다. 승진과 이권 구조에 불확실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실패에 따라오는 문책과 눈치가 두려워 연구개발(R&D)이 주저앉다시피 한 삼성의 현실도 몸과 시간으로 때워가며 피땀 흘려온 선배들에게 낯을 들 수 없게 만든다. 글로벌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은 지난 10년간 수백조원대 인수합병(M&A)에 꾸준히 도전해 왔다. 하지만 삼성은 두세 건 시도하는 데 불과했다. 왜 M&A를 하지 않는가. 조금은 다른 조직 문화와 이질적인 구성원, 편치 않은 보상체계 등이 그렇게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인가?

셋째, 하드웨어 실력이 소프트웨어 역량으로 진화하지 못한다. 한국 법령에는 세계 최고 제도들이 집대성돼 있어 국제적인 귀감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저 쓰레기같이 낮은 수준의 분석과 책임 회피성 증거 자료로 전락했다. 삼성도 독자적인 운영체제나 반도체 후공정, 팹리스 등 소프트한 영역을 시도해 왔으나,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자유롭고 창발적이며, 다양하며, 통합적인 협업이 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가의 수재들을 끌어모아서 이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면, 회사가 국가의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며 개개인에게서도 성취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넷째, 더 이상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초창기에는 독특한 캐릭터와 초인간적인 집중력 그리고 소박한 사생활 등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과 칭송을 받는 멋진 관료 영웅들이 있었다. 국가 사회 건설의 영웅이었다. 그 영웅들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인품의 진지함과 조직 내에서의 치열한 경쟁, 그리고 그들을 발탁하는 리더의 선구안이 있었다. 현대의 대통령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여전히 오너는 할 수 있다. 삼성의 반도체 분야에서만도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뛰어난 과학자와 최고경영자(CEO)가 영웅으로 탄생했으나, 지난 10여 년간은 그런 인물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외부 영입도 대부분 실패했다. 조직이 경쟁의 DNA를 잃어버린 것인가. 진지한 인품과 역량을 가진 후보들을 조직문화가 휘둘러서 살아남지 못하는 건 아닌가.

많은 국민에게 삼성은 일종의 페르소나다. 자기 모습을 보기도 하고, 자기가 욕망하는 바를 배우고 느끼기도 한다. 삼성이 지금의 위기를 멋들어지게 뛰어넘어 연령대를 초월해 모두에게 다시 한번 빼어난 귀감과 등대가 되길 바란다. 삼성의 재도약 서사와 과정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재발견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온 국민이 응원하고 있음을 삼성도 알아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