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반쪽짜리' 미술품 물납제
프랑스 파리 예술의 중심지 마레 지구에 있는 피카소미술관. 20세기 위대한 예술가의 회화, 조각, 크로키 등 4만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컬렉션을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은 피카소 사후 유족이 상속세 대신 기증한 200여 점의 작품을 기반으로 개관했다. 프랑스가 1968년 상속세, 증여세, 재산세 등을 미술품으로 낼 수 있도록 ‘물납 제도’를 도입한 결과다.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한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같은 인상파 화가 작품 상당수도 세금 대신 납부한 것이다. 이 덕택에 프랑스 국민과 관광객은 거부의 저택에 걸려 있던 걸작들을 맘껏 향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성우 전 간송미술관 이사장의 별세로 유가족이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2020년 ‘금동 삼존불 입상’ 등 보물 2점을 경매에 내놓은 것을 계기로 물납제 논의의 물꼬가 트였다. 이어 삼성 이건희 회장 사망 후 ‘세기의 기증’이라고 불리는 유족의 통 큰 기증으로 급물살을 탔다. 2021년 말 국회를 통과해 지난해부터 시행되자 문화계는 환호했다.

그로부터 1호 사례가 나오는 데 20개월 이상이 걸렸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중 한 명인 중국 쩡판즈가 그린 ‘초상’ 등 4점이 오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수장고에 반입된다. 한 상속인이 10점의 미술 작품을 물납 신청한 뒤 민간 전문가 등 7인으로 구성된 물납심의위원회가 네 차례 회의를 통해 적정 판정을 내렸다.

이 제도 이용이 지지부진한 건 규제가 짓누르고 있어서다. 상속세, 그것도 미술품 상속에 따라 발생한 세금으로만 미술품 물납이 엄격히 제한된다. 이마저도 현금이나 주식 등으로 상속세가 충당되면 물납이 금지된다. 작품의 감정 평가와 진위 판별은 부차적인 문제다. 이 같은 규제의 중심에는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미술품으로 세금을 갈음하는 건 ‘부자 감세’라는 시대착오적 프레임이 자리 잡고 있다.

영국이 1896년 도입한 이후 프랑스 네덜란드 일본 등 여러 선진국에서 별문제 없이 적용돼온 미술품 물납제가 유독 우리나라에선 백안시돼 시행이 한참 늦었을 뿐 아니라 조건도 주렁주렁 달렸다. 문화강국은 아직 머나먼 얘기다.

유병연 논설위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