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냄의 미학…추상으로 새로 태어난 달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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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랑 최영욱 개인전, 신작 28점 전시
색·주둥이·형태 등 '3無'의 아름다움
색·주둥이·형태 등 '3無'의 아름다움
'덜어냄의 미학'은 조선 달항아리의 매력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소박한 곡선과 순백의 광채가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백미로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일본이나 중국의 도자기만큼 화려하지 않아도, 국내외 미술품 경매에 나오는 족족 수억~수십억원대에 낙찰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20년째 달항아리를 그려온 최영욱의 미술 인생도 이러한 덜어내기의 여정과 다름없다. 처음에 색을 비웠고, 그다음 백자의 '주둥이'를 걷어냈다. 최근에 이르러 달항아리의 형태마저 없애고 있다.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신작 28점을 선보인 그는 "그동안 항아리를 돋보이게 하려고 명암과 묘사를 더 했는데, 요즘은 군더더기를 빼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흰색만 남은 그의 그림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항아리 아래쪽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산세나 물결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백자를 가마에 구우면서 발생했을 얼룩과 흑점은 밤하늘의 별빛과도 닮았다. 미국 빌게이츠재단, 스페인과 룩셈부르크 왕실 등이 얼핏 평범한 그의 '정물화'를 소장하게 된 배경이다.
최 작가의 작업은 경기도 파주 작업실 인근의 자연을 산책하는 데서 출발한다. 스튜디오로 돌아온 작가는 캔버스 위에 흰색 돌가루와 제소를 겹겹이 쌓는다. 표면을 사포질로 갈아내며 매끄러운 광을 내는 작업을 수십번 반복한다. 그 결과 화면에서 2~3㎜가량 볼록 튀어나온 그의 달항아리는 감초같은 입체감을 더한다.
그의 달항아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천갈래의 빙렬(氷裂)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빙렬은 도자기 표면에 바른 유약이 식으면서 생긴 실금이다. 작가는 이를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인생사에 비유했다. 달항아리 시리즈의 제목은 동양 철학에서 업보(業報)를 의미하는 '카르마'다. 작가가 본격적으로 달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홍익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는 입시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풍경화나 항아리 대접 등을 그리던 그저 그런 화가였다. 작가로서 정체성을 고민하던 그는 캔버스를 수십장 사 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선택의 갈림길을 만났다. 한국관에 덩그러니 놓인 조선백자가 눈에 들어왔다. 쓸쓸한 느낌이 작가 자기 모습과도 비슷해 보였다고 한다. '국보급 유물' 정도의 고급 백자는 아니었지만, 고향을 떠나 우직하게 서 있는 자태에 반했다. 작가는 아무도 찾지 않던 한국관 전시장의 바닥에 눌러앉아 항아리를 관찰했다.
700점이 넘는 카르마 연작 중 달항아리 주둥이의 입구가 보이는 작품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박물관 바닥에서 백자를 올려다본 기억이 작가의 뇌리에 남았기 때문이다. "밑에서 올려다본 백자의 어깨선에서 당당한 기상을 느꼈습니다. '나도 저렇게 인생을 살아보자'란 다짐으로 달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작가의 최근 작업은 세밀한 묘사를 덜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달항아리의 모습을 극사실주의로 옮기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의 기억 속에서 재구상한 추상에 가깝다는 얘기다. 임창섭 미술평론가는 "최영욱의 카르마는 달항아리가 가진 색과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에 관한 진지한 탐구 결과로 그려진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전시된 몇몇 작품들은 작가의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달항아리 표면의 일부를 확대하거나, 흑백의 화면에 윤곽만 남긴 추상화들이 그렇다. 작가가 최근 1~2년 사이 골몰한 새로운 시도다. 달항아리의 변주를 분주하게 모색하는 만큼, 같은 소재를 20년째 다뤄도 지겨울 틈이 없다고 한다.
"초기작을 돌아보면 실제처럼 그리기 위해 치열하게 애쓴 흔적이 보이더라고요. 애착도 가지만 욕심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달항아리를 잘 그리는 것보다는, 항아리를 통해 다른 것들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전시는 10월 21일까지. 안시욱 기자
20년째 달항아리를 그려온 최영욱의 미술 인생도 이러한 덜어내기의 여정과 다름없다. 처음에 색을 비웠고, 그다음 백자의 '주둥이'를 걷어냈다. 최근에 이르러 달항아리의 형태마저 없애고 있다. 서울 관훈동 노화랑에서 신작 28점을 선보인 그는 "그동안 항아리를 돋보이게 하려고 명암과 묘사를 더 했는데, 요즘은 군더더기를 빼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흰색만 남은 그의 그림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항아리 아래쪽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산세나 물결이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백자를 가마에 구우면서 발생했을 얼룩과 흑점은 밤하늘의 별빛과도 닮았다. 미국 빌게이츠재단, 스페인과 룩셈부르크 왕실 등이 얼핏 평범한 그의 '정물화'를 소장하게 된 배경이다.
최 작가의 작업은 경기도 파주 작업실 인근의 자연을 산책하는 데서 출발한다. 스튜디오로 돌아온 작가는 캔버스 위에 흰색 돌가루와 제소를 겹겹이 쌓는다. 표면을 사포질로 갈아내며 매끄러운 광을 내는 작업을 수십번 반복한다. 그 결과 화면에서 2~3㎜가량 볼록 튀어나온 그의 달항아리는 감초같은 입체감을 더한다.
그의 달항아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천갈래의 빙렬(氷裂)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빙렬은 도자기 표면에 바른 유약이 식으면서 생긴 실금이다. 작가는 이를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인생사에 비유했다. 달항아리 시리즈의 제목은 동양 철학에서 업보(業報)를 의미하는 '카르마'다. 작가가 본격적으로 달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홍익대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는 입시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풍경화나 항아리 대접 등을 그리던 그저 그런 화가였다. 작가로서 정체성을 고민하던 그는 캔버스를 수십장 사 들고 무작정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선택의 갈림길을 만났다. 한국관에 덩그러니 놓인 조선백자가 눈에 들어왔다. 쓸쓸한 느낌이 작가 자기 모습과도 비슷해 보였다고 한다. '국보급 유물' 정도의 고급 백자는 아니었지만, 고향을 떠나 우직하게 서 있는 자태에 반했다. 작가는 아무도 찾지 않던 한국관 전시장의 바닥에 눌러앉아 항아리를 관찰했다.
700점이 넘는 카르마 연작 중 달항아리 주둥이의 입구가 보이는 작품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박물관 바닥에서 백자를 올려다본 기억이 작가의 뇌리에 남았기 때문이다. "밑에서 올려다본 백자의 어깨선에서 당당한 기상을 느꼈습니다. '나도 저렇게 인생을 살아보자'란 다짐으로 달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작가의 최근 작업은 세밀한 묘사를 덜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달항아리의 모습을 극사실주의로 옮기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의 기억 속에서 재구상한 추상에 가깝다는 얘기다. 임창섭 미술평론가는 "최영욱의 카르마는 달항아리가 가진 색과 형태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다"라며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에 관한 진지한 탐구 결과로 그려진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전시된 몇몇 작품들은 작가의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달항아리 표면의 일부를 확대하거나, 흑백의 화면에 윤곽만 남긴 추상화들이 그렇다. 작가가 최근 1~2년 사이 골몰한 새로운 시도다. 달항아리의 변주를 분주하게 모색하는 만큼, 같은 소재를 20년째 다뤄도 지겨울 틈이 없다고 한다.
"초기작을 돌아보면 실제처럼 그리기 위해 치열하게 애쓴 흔적이 보이더라고요. 애착도 가지만 욕심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달항아리를 잘 그리는 것보다는, 항아리를 통해 다른 것들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전시는 10월 21일까지. 안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