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간송이 물꼬 트고 이건희가 심은 '미술품 물납제' 첫 사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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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물납제도’ 첫 사례
쩡판즈, 이만익, 전광영 등 거장 작품 4점
8일 국립현대미술관 인도
쩡판즈, 이만익, 전광영 등 거장 작품 4점
8일 국립현대미술관 인도
국립현대미술관은 연간 300만 명이 넘는 국내 대표 예술기관이다. ‘프리즈 서울’ 같은 굵직한 미술행사가 열릴 때면 해외 ‘큰 손’ 컬렉터와 미술계 주요 인사가 들러 전시를 둘러보며 한국 동시대 미술의 격을 가늠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민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한국 예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수준 높은 미술품 소장이 필수다. 2021년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기증한 ‘세기의 컬렉션’ 1488점이 미술관 수장고에 채워지자 국내에 미술 관람·투자 열풍이 분 이유다.
오는 8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수장고에 값비싼 미술작품 4점이 새로 반입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중 한명인 중국 쩡판즈가 그린 ‘초상’ 2점을 비롯해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가’ 이만익의 ‘일출도’, 미술시장 블루칩으로 꼽히는 추상미술 거장 전광영의 ‘Aggregation08’ 등 총 4점이다. 상속세를 예술적 가치가 큰 문화재나 미술품으로 대납하는 ‘미술품 물납제’ 1호 작품들이다. 상속세 마련을 위해 헐값에 해외로 팔려나가거나 어느 이름 모를 수집가의 창고로 숨어버릴 수 있는 귀한 작품들이 전 국민과 만나게 되는 셈이다.
작년 초 물납제 도입 후 첫 사례
7일 미술계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달 해당 미술품 상속인이 낸 물납신청을 허가하고, 이를 세무당국을 통해 상속인에게 통지했다. 물납 대상작 4점은 8일 국립현대미술관에 인도된다. 지난해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으로 미술품 물납제가 도입된 이후 첫 신청 사례다. 문체부 관계자는 “‘물품관리법’에 따라 이달 중 물납 작품 관리주체를 기획재정부에서 문체부로 전환한다”며 “상태조사 등 절차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등록되고, 향후 다양한 전시에서 활용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체부에 따르면 이 상속인은 지난 1월 서울 서초세무서에 10점의 미술작품 물납을 신청했다. 이에 서초세무서가 신청내역을 통보하면서 문체부는 지난 4월 ‘미술품 물납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의에 착수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등 내부 인력과 현대미술 분야별 민간전문가 등 7인으로 구성된 심의위는 현장실사를 시작으로 지난 5월까지 두 달간 네 차례 회의를 거쳐 10점 중 4점의 작품에 대한 물납 적정 의견을 제시했다.
물납신청 미술품의 보존상태와 활용가치, 역사·학술·예술적 가치, 감정가액 적정성 여부 등을 종합 고려했다는 게 심의위의 설명이다. 쩡판즈의 작품 두 점의 경우 해외컬렉션이 빈약한 국립미술관의 상황을 고려해 물납을 받아들였다. 인간소외를 주제로 한 쩡판즈의 작품세계를 고스란히 담은 이번 작품은 지난해 케이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추정가 11억5000만~15억 원을 달고 출품돼 컬렉터들의 관심을 사기도 했다. 쩡판즈는 2013년 자신이 그린 ‘최후의 만찬’이 홍콩 경매에서 약 250억 원에 낙찰돼 당시 아시아 현대미술 최고가를 쓰는 등 중국 현대미술의 기수로 평가 받는다.
1988년 서울올림픽 미술감독을 맡았던 이만익의 작품은 그의 1990년대 초기 화풍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활용도가 높다고 봤다. 전광영의 작품은 총 두 점이 나왔는데, 이 중 시장선호도가 높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Aggregation08’만 적합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 물납신청 작품 5점은 장기적 관점에선 국가 유산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지만, 보존상태나 감정가액 적정성 측면에서 물납 대상으론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미술품 물납제는 정부의 세제개편으로 지난해 1월 1일 상속 개시분부터 적용됐다. 2020년 간송문화재단이 보물로 지정된 불상 2점을 경매에 내놓으면서 처음 공론화됐다. 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이 ‘문화보국’을 내세워 지킨 귀중한 작품들이 해외로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며 국가가 조세로 거둬들이자는 논의가 생겼다. 부동산 등과 달리 객관적 가액 측정이 어렵고 자칫 부유층 특혜라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단 이유로 대납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다가, 삼성가가 고 이건희 회장이 남긴 시장가치 3조원 규모의 미술품 2만3181점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법제화됐다.
예술당국과 미술계는 제도가 시행된 후 1년 넘게 감감무소식이던 차에 나온 이번 1호 미술품 물납 사례를 두고 고무적인 반응을 내놓는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정준모 한국 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 같은 문화강국들은 일찌감치 시행해 온 제도”라며 “유연한 징세를 통한 국가재정 확보라는 개념을 넘어 문화예술 경쟁력 측면에서도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자감세’ 아닌 ‘문화향유 확대’…문화유산 해외반출도 막아
세금을 미술품으로 대납하는 모습은 해외 선진국에선 익숙한 광경이다. 1896년 최초로 미술품 물납제를 시행한 영국은 지난해에도 르네상스 시대 걸작으로 1050만 파운드(약 183억원)에 달하는 ‘벨베데레 아폴로’ 청동상을 상속세 대신 받아 박물관에 전시키로 했다. 1968년 제도를 도입한 프랑스는 20세기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유족에게서 상속세 대신 작품 200여 점을 대납받아 피카소 박물관을 세웠다. 영국 테이트모던, 프랑스 루브르 등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미술관들도 상당수가 세금 대신 받은 작품들이다. 현금 납부 부담이 줄어드는 효과가 기대된다는 점에서 ‘부자감세’라는 비판도 일부 있지만, 최근 들어선 공익적 가치가 더 크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담세능력이 부족한 미술품 상속자가 제도의 실수요층이란 점에서 조세회피나 감세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개인이 독점하던 예술품을 대중이 향유할 수 있고 우수 문화재의 해외유출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어 문화복지 향상 효과가 있다는 게 문체부의 설명이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연간 소장품 구입예산이 47억 원에 불과해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소장하는 데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미술품 물납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미술계에선 미술품 물납제도가 정책 취지대로 정착하기 위해선 보다 정밀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로선 상속 재산 중 미술품에 부과된 상속세에 한해 물납이 가능하고, 금융재산으로 우선 상속세를 내도록 규정하는 등 걸림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준모 대표는 “모든 상속 재산에 대한 세금을 미술품으로 대납할 수 있어야 제2, 제3의 미술품 물납 작품들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강대금 문체부 지역문화정책관은 “오래 기다려온 첫 물납 미술품을 받게 돼 고무적”이라며 “이제 첫 발을 내디딘 만큼, 제도 시행에서 발견한 미비점을 보완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유승목 기자
오는 8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수장고에 값비싼 미술작품 4점이 새로 반입된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중 한명인 중국 쩡판즈가 그린 ‘초상’ 2점을 비롯해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가’ 이만익의 ‘일출도’, 미술시장 블루칩으로 꼽히는 추상미술 거장 전광영의 ‘Aggregation08’ 등 총 4점이다. 상속세를 예술적 가치가 큰 문화재나 미술품으로 대납하는 ‘미술품 물납제’ 1호 작품들이다. 상속세 마련을 위해 헐값에 해외로 팔려나가거나 어느 이름 모를 수집가의 창고로 숨어버릴 수 있는 귀한 작품들이 전 국민과 만나게 되는 셈이다.
작년 초 물납제 도입 후 첫 사례
7일 미술계에 따르면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달 해당 미술품 상속인이 낸 물납신청을 허가하고, 이를 세무당국을 통해 상속인에게 통지했다. 물납 대상작 4점은 8일 국립현대미술관에 인도된다. 지난해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으로 미술품 물납제가 도입된 이후 첫 신청 사례다. 문체부 관계자는 “‘물품관리법’에 따라 이달 중 물납 작품 관리주체를 기획재정부에서 문체부로 전환한다”며 “상태조사 등 절차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등록되고, 향후 다양한 전시에서 활용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체부에 따르면 이 상속인은 지난 1월 서울 서초세무서에 10점의 미술작품 물납을 신청했다. 이에 서초세무서가 신청내역을 통보하면서 문체부는 지난 4월 ‘미술품 물납심의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의에 착수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등 내부 인력과 현대미술 분야별 민간전문가 등 7인으로 구성된 심의위는 현장실사를 시작으로 지난 5월까지 두 달간 네 차례 회의를 거쳐 10점 중 4점의 작품에 대한 물납 적정 의견을 제시했다.
물납신청 미술품의 보존상태와 활용가치, 역사·학술·예술적 가치, 감정가액 적정성 여부 등을 종합 고려했다는 게 심의위의 설명이다. 쩡판즈의 작품 두 점의 경우 해외컬렉션이 빈약한 국립미술관의 상황을 고려해 물납을 받아들였다. 인간소외를 주제로 한 쩡판즈의 작품세계를 고스란히 담은 이번 작품은 지난해 케이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추정가 11억5000만~15억 원을 달고 출품돼 컬렉터들의 관심을 사기도 했다. 쩡판즈는 2013년 자신이 그린 ‘최후의 만찬’이 홍콩 경매에서 약 250억 원에 낙찰돼 당시 아시아 현대미술 최고가를 쓰는 등 중국 현대미술의 기수로 평가 받는다.
1988년 서울올림픽 미술감독을 맡았던 이만익의 작품은 그의 1990년대 초기 화풍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활용도가 높다고 봤다. 전광영의 작품은 총 두 점이 나왔는데, 이 중 시장선호도가 높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Aggregation08’만 적합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 물납신청 작품 5점은 장기적 관점에선 국가 유산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지만, 보존상태나 감정가액 적정성 측면에서 물납 대상으론 부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미술품 물납제는 정부의 세제개편으로 지난해 1월 1일 상속 개시분부터 적용됐다. 2020년 간송문화재단이 보물로 지정된 불상 2점을 경매에 내놓으면서 처음 공론화됐다. 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이 ‘문화보국’을 내세워 지킨 귀중한 작품들이 해외로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며 국가가 조세로 거둬들이자는 논의가 생겼다. 부동산 등과 달리 객관적 가액 측정이 어렵고 자칫 부유층 특혜라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단 이유로 대납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다가, 삼성가가 고 이건희 회장이 남긴 시장가치 3조원 규모의 미술품 2만3181점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법제화됐다.
예술당국과 미술계는 제도가 시행된 후 1년 넘게 감감무소식이던 차에 나온 이번 1호 미술품 물납 사례를 두고 고무적인 반응을 내놓는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정준모 한국 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 같은 문화강국들은 일찌감치 시행해 온 제도”라며 “유연한 징세를 통한 국가재정 확보라는 개념을 넘어 문화예술 경쟁력 측면에서도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자감세’ 아닌 ‘문화향유 확대’…문화유산 해외반출도 막아
세금을 미술품으로 대납하는 모습은 해외 선진국에선 익숙한 광경이다. 1896년 최초로 미술품 물납제를 시행한 영국은 지난해에도 르네상스 시대 걸작으로 1050만 파운드(약 183억원)에 달하는 ‘벨베데레 아폴로’ 청동상을 상속세 대신 받아 박물관에 전시키로 했다. 1968년 제도를 도입한 프랑스는 20세기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유족에게서 상속세 대신 작품 200여 점을 대납받아 피카소 박물관을 세웠다. 영국 테이트모던, 프랑스 루브르 등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미술관들도 상당수가 세금 대신 받은 작품들이다. 현금 납부 부담이 줄어드는 효과가 기대된다는 점에서 ‘부자감세’라는 비판도 일부 있지만, 최근 들어선 공익적 가치가 더 크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담세능력이 부족한 미술품 상속자가 제도의 실수요층이란 점에서 조세회피나 감세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개인이 독점하던 예술품을 대중이 향유할 수 있고 우수 문화재의 해외유출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어 문화복지 향상 효과가 있다는 게 문체부의 설명이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연간 소장품 구입예산이 47억 원에 불과해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소장하는 데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미술품 물납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미술계에선 미술품 물납제도가 정책 취지대로 정착하기 위해선 보다 정밀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로선 상속 재산 중 미술품에 부과된 상속세에 한해 물납이 가능하고, 금융재산으로 우선 상속세를 내도록 규정하는 등 걸림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준모 대표는 “모든 상속 재산에 대한 세금을 미술품으로 대납할 수 있어야 제2, 제3의 미술품 물납 작품들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강대금 문체부 지역문화정책관은 “오래 기다려온 첫 물납 미술품을 받게 돼 고무적”이라며 “이제 첫 발을 내디딘 만큼, 제도 시행에서 발견한 미비점을 보완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