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YG엔터테인먼트
/사진=YG엔터테인먼트
배우 유승호가 데뷔 25년 만에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파트1:밀레니엄이 다가온다'로 첫 무대에 오르면서다.

지난 8월 6일 상연을 시작해 지난달 28일 막을 내린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1985년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동성애자와 에이즈, 모르몬교 등 차별과 편견의 표적이 된 사람들이 겪는 혼란과 현실, 그리고 이상을 전한다. 작가 토니 커쉬너 역시 유대계 성소수자로 자신의 정체성과 고통스러웠던 개인사를 무대 위에서 풀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유승호는 프라이어 윌터 역에 손호준과 함께 캐스팅됐다. 프라이어는 당시 주류라 할 수 있는 오랜 전통의 백인 와스프 가문 출신이지만 남자를 사랑하는 에이즈 환자라는 설정이다. 2000년 MBC '가시고기'로 데뷔해 올해로 데뷔 25년 차인 유승호의 첫 연극 도전이라는 점에서 더욱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는 체중 감량과 화려한 소품 등을 활용하며 당시 뉴욕에서 가장 잘나가는 드랙 아티스트 프라이어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았다.

첫 공연 당시 "너무나 죄송한 말인데, 대사만 틀리지 말자는 생각으로 무대에 올랐다"며 "너무 떨려서 손과 발이 다 흔들려서 사시나무 떨듯 했다"면서 당시를 떠올렸다.

공연이 공개된 초반, 데뷔 때부터 '연기천재'라는 말을 들었던 유승호가 처음 겪었을 호불호 반응도 나왔지만, 이를 보완하며 극 후반부엔 "완벽했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그동안 공연을 해왔던 사람들과 관객들을 존중하고, 자신이 연기했던 성소수자가 가볍거나 편견에 휩싸이지 않도록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내뱉던 유승호는 "이 작품을 하면서 장트러블이 심해 이틀에 한끼 정도만 먹었다"며 "공연 시작 전에 64kg 정도였는데, 끝나고 나선 56k였다"면서 두달 만에 8kg이 줄었다고 밝혔다. 우려의 반응을 보이자 "프라이머가 에이즈를 앓고 있다는 설정에 맞는 거 같다"며 "지금은 건강하다"면서 웃는 유승호였다.

소화장애를 앓을 만큼 온몸을 다해 예민하게 연기했고, "스스로 노력 점수는 100점을 주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한 작품이었다. 이미 '믿고 보는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은 유승호지만, 쉽지 않은 도전을 마무리했기에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감이 더해지고 있다.
/사진=YG엔터테인먼트
/사진=YG엔터테인먼트
▲ 대장정을 마쳤다.

연습을 시작하고 무대에 오른 기간을 합하면 3개월 정도인데, 모든 게 추억이 됐다. 뻔한 얘기지만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더라. 처음 일주일은 엄청나게 떨렸는데, 이제 그 떨림이 그립다.

▲ 홍보가 아닌, 작품을 마무리한 시기에 인터뷰를 결정했다.

중간에 할 수도 있었는데, 무대에서 전 초보다 보니 뭔가 할 수 있는 용기가 안 났다. 이 연극을 수정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 부분에 집중하기 위해 다 끝내고 맘 편히 생각들을 정리하고 하는 게 좋은 거 같았다. 스스로 노력을 많이 했다. 노력은 100점인데, 배우로서 '연기를 잘했다' 이건 점수를 매기기 부끄러울 정도다.

▲ 어려운 도전이었는데, 시작한 이유가 있었나.

이전에도 기회가 있었지만, 무대를 무서워한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미루고 있다가 30대를 지나고 서른 두살이 됐는데, '아무리 겁이 나도, 피하기만 한다고 해서 발전이 있을까' 싶더라. 그러던 와중에 이 작품이 들어왔다. 이 대본을 읽고 하나도 이해를 못 한 상태로 신유청 연출님을 만났다. 대본 자체가 일반 매체와 보던 것과 형식이 달랐다. 추상적인 말도 많고, 이야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느낌도 있었다. 그건 그 후에 제가 공부하며 해소가 됐지만, 첫 느낌은 그랬다. 첫 미팅 때 '단 한구간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연출님이 '승호씨 말고 다른 배우들도 그렇게 들어올 거다'라고, '걱정하지 말고 들어오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선뜻 '하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거 같다. 저는 선택을 할 때 '변화를 줘야지', '이번엔 이걸 해야지'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 여러 고민을 쌓아오고 있다가 뭔가 해소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 하게 된다. 그래서 '홀린 듯이 선택하게 됐다'고 말해왔다.

▲ 그 고민은 좀 해소됐을까.

고민이 해소가 됐고, 안된 부분도 있다. 예전부터 연기를 잘하는 선배님들을 보면, 오랜 기간 연극을 하며 다져온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연극을 하면 연기를 잘하게 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매체에서는 캐릭터나 연기에 한계가 있었는데 연극에서는 보다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또 무대라는 공간을 무서워하다 보니, 그걸 깨부수면 제 인생에도 변화가 있을 거 같았다. 결론적으로 무대 공포증 해결에 도움이 됐고, 배우가 기본적으로 가져가야 하는 연기 스킬이 있는데 그런 부분을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은 거 같다.

▲ 사전에 스터디도 하고, 많이 노력했음에도 초반에 반응이 엇갈리기도 했다. 데뷔 후 처음 겪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제가 못했으니까 그런 결과가 나온 거 같다. 변화하고 노력했다고 하지만 그건 제 노력이고, 결과가 중요하다. 공연 중간에 그런 반응을 보면서 당연히 아팠다. 그런데 아픈 건 둘째치고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겠다 싶었다. 큰돈과 시간을 들여서 오신 분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건 문제니까. 어떤 부분에서 그분들이 그렇게 느꼈을지를 고민했고, 동료 배우들에게 피드백을 받았다. 최대한 빨리 프라이어를 완벽하게 만들고자 최선의 노력을 했고, 회차가 진행될수록 어느 정도 해결이 됐다고 느껴서 감사하게 생각한 거 같다.

▲ 프라이어가 생각보다 비중이 적다는 반응도 있었다.

저는 제가 주인공이라서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다. 이전부터 항상 '주인공이 아니어도 된다'고 어필해 왔다. 개런티도, 분량도 상관없이 '할 수 있다'고 했음에도 이뤄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 성소수자와 에이즈 등의 설정이 독특해서 마음이 쏠린 걸까.

그런 마음도 분명히 있었던 거 같다. 매체에서는 표현 등에 한계가 존재한다면 연극에서는 그런 점에서 자유롭기에 더 매력적이었던 거 같다. 다만 제가 이해도가 없는 지점에서 시작했다. 막상 '하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풀어갈지 고민이 됐다. 전 성소수자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모른다. 제가 느끼는 사랑의 크기와 아픔을 성소수자의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대역이었던 루이스라는 인물을 성별이 아닌 그저 제가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놓고 봤다. 그러니 다가가기 쉬웠다. 하나 더 연출님이 당부한 건 성소수자를 우스꽝스럽게 나타내면 안 된다는 거였다. 꼭 드래퀸이고 성소수자라고 해서 목소리가 얇고 톤을 높이며 표현하진 않더라. 그래서 그런 편견이 될 수 있는 설정,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부분을 과감하게 뺐다. 그렇게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유승호/사진=글림컴퍼니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유승호/사진=글림컴퍼니
▲ 첫 무대는 어땠나.

너무 긴장을 많이 했다. 그때 저의 마음가짐은 '배운 대로 대사 틀리지 말자' 이 정도였다. 너무 죄송스러운데, 손발을 사시나무 떨듯 너무너무 떨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까지 왔다. 나에게 다가온 시간이고 틀리지 말자는 생각만 했다. 하고 나니 어떻게 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 유승호도 무대 공포증이 있다는 게 놀랍다.

지금도 첫 촬영 땐 많이 떤다. 그런데 촬영장에서는 주 관객을 카메라라 생각해서 주변 사람들이 연기할 땐 안 보인다. 그런데 팬미팅을 하면서 무대에 오르니 그 생생한 반응들이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객석의 눈 하나하나가 카메라처럼 느껴졌는데, 그런 부분에서 무대에 대한 겁이 나기 시작했다. 쉽게 연극이나 뮤지컬을 '한다'고 하지 못한 이유다.

▲ 이번 작품을 하면서 많이 이겨냈을까.

제가 30회 공연이었는데, 끝나기 5회 전부터 '떨린다'가 아니라 '빨리 나가고 싶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스스로 '왜 이런 감정이 들기 시작했을까' 싶어서 신기했다. 이전 회차보다는 연기를 하면서 호흡을 맞추며 즐거울 때도 있고, 긴장할 때도 있고, 즐거운 경험이 됐다.

▲ 파트2가 있는 작품이다. 추후 참여 의향이 있을까.

연습할 때 파트2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2개를 합치면 7시간 정도의 공연이 돼 '배우들이 준비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와 결론적으로 진행이 안 됐다. 파트2가 된다면 전 또 하고 싶다. 전 재밌었다. 관객들이 어려워했던 부분들이나 '왜 이렇게 행동할까' 했던 부분도 다 해소되고, 코믹적인 부분도 더 많다. 그래서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끌고 갈 수 있겠다 싶었다.

▲ 연극은 매 무대가 라이브다. 기억에 남는 실수가 있을까.

마지막 공연에서 늘 던지던 대로 소품용 콘돔을 던졌는데, 너무 멀리 날아갔다. 마지막 공연이라 신나서 더 세게 던진 건 아니었다.(웃음) 멀리 떨어진 콘돔을 못 찾아서 땀이 엄청나게 났다. 살면서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땀으로 흠뻑 젖는 느낌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이태빈 배우보다 제가 더 형이라 제가 상황을 이끌어야 할 거 같았다. 여분으로 주머니에 더 있는 걸 알아서 그걸 꺼내며 '이거 여기 더 있네'라고 애드리브를 했다. 이 외에도 실수 횟수가 많았다. 그런데 함께 연기하는 노련한 선배들이 있다. 그분들이 잘 감싸서 해주셨다.

▲ 2개월 동안 공연을 하다 보니 몸 관리도 필수 아닌가.

저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손호준 배우뿐인데, 3시간 20분 러닝타임이 에너지 소모가 얼마나 큰지 제가 아니까, 대신하게 할 수 없었다. 공연을 하면서 첫째가 '아프지 말자'였다. 연극, 뮤지컬 배우들이 목 관리를 얼마나 열심히 하고, 영양제를 얼마나 챙겨 먹는지 이번에 알았다.(웃음) 저는 정상적인 식사가 힘든 상태라 고용량 영양제를 먹으니 속이 안 좋더라. 그래서 오롯이 버티고, 운에 맡겼다.

▲ 식사를 하지 못한 건 캐릭터 설정 때문인가.

처음엔 그랬다. 그래서 꾸준히 다이어트를 했다. 상의 탈의 장면이 있고, 에이즈 환자이기 때문에 살이 빠져 있어야 했다. 2회차인가 3회차 공연 인터미션 때 너무 배가 고파서 뭘 좀 먹었는데, 갑자기 장트러블이 왔다. 다음 인터미션까지 50분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공연이 있는 날엔 아무것도 안 먹었다. 다음날 공연이 없을 때만 공연을 끝낸 후 소화가 잘되는 걸로 찾아 먹었다. 그러다 보니 살이 쭉쭉 빠졌다. 프라이어를 보여주기 위해선 참 좋은데, 64kg에서 시작했는데 마지막 공연 땐 56kg였다. 공연이 끝난 후 짜고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일주일간 계속 먹었다. 이제 일을 해야 하니 관리하면서 먹는다. 지금은 괜찮다.

▲ 퇴근길도 처음엔 민망해하는데, 마지막엔 노련해졌더라.

그것도 할 말이 많다.(웃음) 처음에는 그런 문화를 몰라서 '왜 서 계시지?'하고 냅다 지나쳐 갔다. 너무 죄송하다. 2회차를 그렇게 하고 나서, 손호준 배우가 '저기 팬분들 계셔' 해서 알았다. '승호야, 큰돈과 긴 시간을 들여 우리를 보러 오신 분들이고 우린 그들에게 인사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너도 했으면 좋겠어'라고 해주셨다. 한두번 가족 약속 때문에 못 했는데, 그 후엔 짧게라도 인사했다. 유승호라는 배우는 팬미팅도 많이 안 하고, 오프라인에서 많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만나는 게 재밌었다. 챌린지 같은 걸 해달라고 해서 뭔지도 모르고 했는데, 좋아해 주시더라. 그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다 해주려고 노력한다. 연극은 매일 똑같이 연기할 수 없지만, 재밌게 한다거나 좋았다고 했을 때 그대로 해드리려 노력을 많이 했다.

▲ 다른 공연에 대한 욕심이 생겼을까.

왜 선배님들은 센 연기를 한 후 잔잔한 걸 원하는지 알겠더라.(웃음) 이제 저에게 어떤 연극이 올지 모르겠지만 잔잔하면서 감동을 줄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좀 더 규모가 작은 무대에서 관객들과 가까이서 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 더 작은 공연장에서 하면 더 편안하고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다고 하더라. 대부분 그들의 가르침이 맞아서 이 말도 맞는 거 같다.

▲ 공연 외에 다른 작품은 정해졌을까.

원래 중간에 검토하는 시간을 갖는데 이번엔 저에게 너무 큰 도전이었고, 밥을 못 먹어서 집에서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뭘 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웃음) 이제 끝났으니까, 저에게 제안이 온 작품들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좋은 작품으로, 재밌는 걸로 결정하고 싶다. 그 결정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 같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