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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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 무역협정이 미국 노동자와 기업을 약화시키는 ‘뒷문’ 노릇을 합니까?” (미국 철강 노조 관계자)

“중국은 관세를 피하려 멕시코로 물건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반덤핑·상계관세 소송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시웨이볼트앤드스페셜즈 관계자)

미국이 멕시코, 캐나다와 체결한 무관세협정(USMCA)이 중국이 멕시코를 경유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미국에서 강하게 제기됐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ITC)가 8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개최한 USMCA 원산지 규정 개정 관련 청문회에 참석한 미국 기업 및 노동조합 관계자들은 중국산 제품의 불공정 경쟁 문제를 제기하며 USMCA를 손질해야 한다는 의견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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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의 ‘원산지 위장 통로’ 역할

이날 청문회는 USMCA 개정(2026년)을 앞두고 업계 의견을 듣기 위해 개최됐다. USMCA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후신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7년 취임 직후 NAFTA 재협상을 시작해 철강·알루미늄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캐나다와 멕시코를 압박했다. 2020년 7월 발효된 USMCA는 주로 자동차 산업을 겨냥하고 있다. 캐나다, 멕시코에서 생산한 제품을 미국으로 수입할 때 2.5% 관세를 물리지 않는 대신 까다로운 원산지 규정을 적용해 이 지역 내 생산을 장려하는 것이 골자다.

‘니어쇼어링(인접국가에서 아웃소싱)’을 강화한 USMCA 이후 삼성 LG 현대차 포스코 CJ 등 국내 기업도 멕시코에 잇달아 공장을 지었다. 한국의 대멕시코 투자 금액은 2020년 1100만달러에서 2022년 3억9600만달러로 급증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멕시코 투자를 급격히 늘리면서 USMCA를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른다. 미국은 트럼프 전 대통령 이후 중국에 상대적으로 높은 관세율(평균 12%)을 적용한다. 화웨이 등 중국 기업을 겨냥해 미국 내 수입을 제한하는 조치도 시행 중이다.

이날 청문회 참가자들은 중국 기업이 이런 관세·비관세 장벽을 우회하고자 멕시코 내 투자를 확대하고, 멕시코산 제품으로 위장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짐 워런 단조공업협회(FIA) 회장은 “중국 기업이 멕시코에서 포드 공장을 인수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중국 기업이 중국 노동자를 데려오고, 중국산 공구를 가져와서 멕시코에서 물건을 생산한다”며 “이런 ‘뒷구멍’을 닫지 않으면 미국 기업이 불공정한 경쟁에 노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동차 등 부품으로 사용되는 패스너 생산 업체 시웨이 관계자는 “지난해 미국은 멕시코에서 10억달러어치 패스너를 수입했는데 이는 2012년 이후 최대”라며 “그 대신 중국으로부터 수입이 감소한 것을 보면 중국이 멕시코를 우회 수출 통로로 활용하는 것이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다른 참가자는 “USMCA가 중국 원산지 공급망 전체를 위한 길을 열고 있다”고 거들었다.

“美 일자리 되레 빼앗아” 불만

이날 청문회에선 USMCA가 미국이 아니라 멕시코 등 다른 지역에 투자를 유도한다는 불만이 여러 차례 제기됐다. ‘니어쇼어링’으로는 미국 내 일자리 창출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얘기다. 미국자동차노조(UAW) 소속 제이슨 웨이드 행정보조관은 “USMCA가 도입된 후 미국과 멕시코 간 무역 불균형(대멕시코 무역적자)이 급증했다“고 말했다. 또 “스텔란티스, 존디어, 볼보 같은 기업은 이 협정 덕분에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며 “실패한 무역법”이라고 꼬집었다.

경제정책연구소(EPI) 소속 애덤 허시 선임경제학자는 증인으로 나서 “USMCA는 NAFTA와 마찬가지로 기업들이 저임금 국가로 일자리를 옮기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쟁력 있는 북미 자동차산업, 양질의 일자리를 목표했던 협정이 제3국의 불법 보조금과 노동 착취를 통해 생산된 비원산지 콘텐츠(부품 등)를 마법처럼 원산지 콘텐츠로 바꿔주는 데 일조한다”고 덧붙였다.

오는 11월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USMCA는 이런 불만을 반영해 상당폭 손질될 가능성이 높다. 제현정 한국무역협회(KITA) 워싱턴 본부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 내 투자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크게 손질하려 할 수 있고, 해리스 부통령이 당선되면 환경 규제 등이 강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어느 쪽이 당선되더라도 사이버 안보 등을 이유로 내세워 공급망을 조정하려는 내용이 추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