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 Opera의 '토스카' | 사진. © Karen Almond / Met Opera
Met Opera의 '토스카' | 사진. © Karen Almond / Met Opera

푸치니는 베르디와 바그너처럼 평생을 오페라 작곡에 몰두했다. 흥미롭게도 그가 쓴 12편의 오페라 중 상당수가 여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전통 판소리의 '심청가'나 '춘향가'처럼 푸치니의 작품은 '투란도트', '나비부인', '수오 안젤리카', '마농 레스코' 등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토스카’ 역시 마찬가지다.

막이 오르자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무대에 백석종이 등장했다. 그는 토스카의 상대 역 카바라도시를 맡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은 가수 역량의 최대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유럽의 권위 있는 극장들의 객석 규모는 대부분 2000석 전후이고, 파리의 바스티유 극장이 2700석으로 제일 큰 편에 속한다. 반면 메트오페라의 객석 수는 3800석에 달하다 보니 극장을 울려낼 수 있는 성량을 가졌는지 여부가 중요한 잣대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유명 가수들 중에 메트 데뷔 이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메트에 서는 가수에게는 명성이나 탁월한 예술성 이전에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이 걸린 셈이다.
푸치니의 '토스카'에서 카바라도시 역을 맡은 백석종 | 사진. © Karen Almond / Met Opera
푸치니의 '토스카'에서 카바라도시 역을 맡은 백석종 | 사진. © Karen Almond / Met Opera
백석종이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로 압도적 성량과 안정된 고음을 꼽을 수 있다. 객석 끝까지 뻗어나가는 청량한 사운드와 섬세한 감성이 더해졌다. 2막에서 사카르피라에게 고문을 당하던 카바라도시가 나폴레옹 군대의 승리 소식을 듣고 “Vittoria!(승리다!)”를 외치는 장면은 이날 공연의 정점이었다.

백석종은 리릭 스핀토에 속하는 테너이다. 그는 서정성이 부각되는 ‘리릭’과 찌르는 듯한 강렬함을 상징하는 ‘스핀토’의 속성을 자유자재로 조정했다. 공연장에서 만난 한 성악가는 상황에 따라 소리의 농도를 조절해 안정적으로 구현하는 테크닉은 아무나 갖출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Met Opera의 '토스카' | 사진. © Karen Almond / Met Opera
Met Opera의 '토스카' | 사진. © Karen Almond / Met Opera
백석종은 3막에 등장하는 이 작품의 대표 아리아 ‘E lucevan le stelle(별은 빛나건만)’를 의외의 방식으로 빚어냈다. 토스카와의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하는 이 아리아는 격앙된 감성을 쏟아내는 드라마틱한 곡이다. 그러나 그는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을 갈망하는 처절한 몸부림 대신, 절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체념적 평온함으로 해석했다. 쏟아내거나 호소하는 방식이 아닌, 상실의 여백을 선택한 백석종은 청중들을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연주에 참여한 한국계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안젤라 위와 타이완 비올리스트 엔치 치엥도 백석종의 활약을 높이 평가했다.
Met Opera의 '토스카' | 사진. © Karen Almond / Met Opera
Met Opera의 '토스카' | 사진. © Karen Almond / Met Opera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만큼 엽기적이거나 극단적이진 않지만, 토스카 역시 구조적인 한계점이 명확하다. 갑작스러운 서사의 전개나 개연성을 무시한 진행에 당혹감이 몰려온다. 2막에서 널뛰듯 변하는 토스카의 심리상태나, 두 명의 주인공이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도 납득하기 어렵다. 만연하는 논리적 비약과 허점투성이 전개로 작품은 끝을 맺는다.

모든 비현실의 덫을 극복하는 것은 위대한 음악이다. 노래는 비논리에 숨결을 불어넣고 단절된 서사를 이어간다. 오페라에서 가수의 역할이 결정적인 이유다. 이날 백석종과 함께 작품을 이끌었던 토스카 역의 알렉산드라 쿠작(Aleksandra Kurzak)은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올림피아 역할로 메트에 데뷔한 이후,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투란도트’의 류, 그리고 ‘토스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두 주역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독보적 음색은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을 사로잡았다.

올 시즌 메트에는 백석종을 포함해 5명의 한국인 성악가가 출연한다. 매년 연말 공연으로 열리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 소프라노 박혜상이 파미나로, 테너 듀크김이 상대역 타미노를 맡는다. 11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푸치니의 ‘라 보엠’에서 바리톤 김기훈이 쇼나르로 출연하고, 베이스 박종민은 콜리네 역으로 무대에 오른다.

김동민 뉴욕클래시컬플레이어스 음악감독·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