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도쿄 신국립극장에 소개된 이탈리아 오페라들은 전통의 관점에서 제작돼 작품의 근원에 보다 잘 접근하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일본 청중에 대한 배려이자 취향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아무래도 일본 관객보다는 유럽 관객이 다양하고 현대적인 오페라 연출에 익숙하기 때문.

필자가 경험한 <아이다>와 <라 보엠>, <돈 파스콸레>, <팔스타프>를 생각해보면 모두 전통적인 연출을 기반으로 한 프로덕션이었다. 그만큼 신국립극장의 예술적인 비전은 오페라 하우스 고유의 질적향상과 전통의 축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느껴진다.

리체우 극장과 마시모 극장 등이 공동제작한 <몽유병의 여인>의 도쿄 신국립극장 초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벨리니의 오페라의 아름다움은 절제에서 온다는 걸 느꼈던 공연이었다. 신국립극장 측의 훌륭한 주연 및 지휘자 캐스팅으로, 일본에서 오히려 이탈리아보다 더 이탈리아적인 오페라가 탄생했다.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 사진출처. 도쿄 신국립극장 페이스북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 사진출처. 도쿄 신국립극장 페이스북
선율의 승부사, 벨리니

몽유병 환자를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쓴 건 벨리니가 유일하다. <몽유병의 여인>은 몽유병이라는 소재도 특이하지만, 벨리니의 강점인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작품 전반에 녹아있어 벨칸토(음색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이탈리아의 가창 기법) 오페라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벨리니는 이 작품에 이어 <노르마>와 <청교도>와 같은 이탈리아 벨칸도 오페라의 최고작을 계속 썼는데, 몽유병의 여인과 이 두 작품은 벨리니 3부작으로 불린다.

스위스 시골 마을에 사는 젊고 아름다운 방앗간집 양녀 아미나는 부유한 지주 청년 엘비노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엘비노는 아미나와 만나기 전, 동네 여관 주인 리사와 사귀다 헤어졌다. 리사는 엘비노를 잊지못해 아미나에게서 그를 빼앗을 궁리를 한다. 어느날 영주의 외아들 로돌포 백작이 마을에 방문해 신분을 속이고 리사의 여관에 묵는데, 몽유병을 앓던 아미나가 잠옷바람으로 백작이 묵던 방으로 들이닥친다. 백작은 아미나가 정상이 아니란 생각에 얌전히 잠을 재우고 자신은 밖으로 나가버린다. 하지만 리사는 엘비노와 동네 사람들을 불러들여 다음날 백작의 방에서 참들어 있는 아미나를 보게 만들면서 엘비노는 약혼 반지를 집어던진다. 그후로 백작과 엘비노, 아미나와 리사의 이야기가 극적으로 전환되는데 종래에는 백작의 증언으로 아미나의 결백함을 알게 된 엘비노는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며 이야기가 끝난다.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 사진출처. 도쿄 신국립극장 페이스북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 사진출처. 도쿄 신국립극장 페이스북
간단한 줄거리지만 벨리니의 오페라는 연극적 요소보다는 음악에 집중한 작품이다. 여타 오페라에서는 속사포 같은 대사와 웅장한 앙상블, 크레센도를 활용해 감정을 분출하는 음악이 주를 이루지만 벨리니는 줄거리를 파악하지 못해도 크게 상관없을 정도로 음악 그 자체가 빛나는 작품들을 썼다. 대본보다는 선율로 승부하는 작곡가였던 셈.

도쿄 무대서 빛난 벨리니의 절제미

도쿄 신국립극장의 <몽유병의 여인>에서는, 마에스트로 베니니의 활약이 극을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7년 한국 국립오페라단이 공연한 <막베트>에서 호연한 바 있는 만큼 그의 음악은 거장의 면모를 보여줬다. 오케스트라는 낭창한 선율과 충분한 소스테누토, 효과적인 레가토를 바탕으로 과하지 않은 리듬감을 표현했다. 또 악보 위 음표 이상의 뉘앙스를 자아내는 쉼표가 여백의 미를 주는 등 간결한 벨칸토 스타일 오페라를 충실히 구현해냈다.

음악이 진행될수록 과하지 않은 에너지의 발산과 수렴, 넘실거리는 멜로디와 정교한 대조를 이루는 강약의 앙상블이 두드러졌다. 특히 성악과 함께 하는 유니즌에서 유장한 템포에서 기인하는 편안함과 반짝이는 목관의 음색을 바탕으로, 가수에게 안정적이면서도 충분한 호흡과 표현을 유도했다. 마치 잔잔한 파도 위에 비친 빛나는 태양빛의 반짝임처럼 목소리가 빛났다.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 사진출처. 도쿄 신국립극장 페이스북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 사진출처. 도쿄 신국립극장 페이스북
반주를 맡은 도쿄 필하모닉이 마치 이탈리아 중형급 오페라 하우스의 오케스트라로 변신한 듯했는데, 뮌헨이나 비엔나 소재의 큰 극장들의 스펙타클하고 강력한 벨리니와는 전혀 달랐다. 벨리니가 의도한 전원적인 판타지가 이어졌기에 디테일과 극의 흐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를 지닌 극장을 고려하면, 여느 이탈리아 극장의 작품보다 완성도가 높았다.

이탈리아보다 더 이탈리아적인 무대

소프라노 클라우디아 무스키노는 감동적인 가창과 연기력을 보여줬다. 1막 첫 등장의 카바티나와 카발레타(“Come per me sereno” / “Solra il sen la man mi posa”)부터 안정적인 톤과 남다른 테크닉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바로 이전의 현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들이 보여준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보다 20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했는데, 과시적인 표현력이나 찌르는 듯한 강렬함 없이 자연스러운 연결과 아름다운 발성을 들려줬다. 화려한 고음보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감정의 표현에 관객들이 온전히 녹아들었다.

특히 진득하면서도 깊은 호소력을 자아낸 2막 마지막 아미나의 카바티나와 카발레타(“Ah! non credea mirarti” / “Sì presto estinto, o fiore”)로 새로운 소프라노 스포가토(Soprano sfogato)가 탄생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목관 악기와 함께 호흡하고 바이올린의 선율과 노래하는 그녀가 앞으로 얼마나 더 큰 궤적을 이뤄갈지 기대됐다.

1964년생의 정통 이탈리아 벨칸토 테너인 안토티노 시라구사의 엘비노 또한 가벼운 비성, 투명한 고음을 견지했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것.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 속에서 적절한 강조를 주어 엣 시대 벨칸토 테너를 연상케했다. 그의 가창은 1막 2중창 “반지를 그대에게 드리오”(Prendi l’anel ti dono)부터 소프라노와 절묘한 앙상블을 이뤘다. 극중 인물의 반대되는 감정이 교차하는 1막 마지막 2중창까지 환상적이었다.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 사진출처. 도쿄 신국립극장 페이스북
오페라 <몽유병의 여인> / 사진출처. 도쿄 신국립극장 페이스북
고난이도로 악명 높은 2막 첫 아리아 같은 경우 대부분 성공적인 높은 음들을 성공시켰는데, 간혹 높은 음표를 같은 스케일 안에서 낮게 처리하여 음악적으로 아무 문제 없이 처리한 솜씨도 훌륭했다. 바리톤 히데카츠 츠마야의 로돌포 백작 또한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가창으로 극에 탄력을 가미하며 기대 이상이었다. 신국립극장은 탁월한 앙상블과 통일된 음색, 템포와 비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순발력으로 단조로울 수 있는 작품 속 합창의 역할을 극적으로 소화했다.

연출가 바바라 류크는 스위스 시골의 분위기에 약간의 현대적인 요소를 첨가하여 스토리에 충실한 안정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특히 이탈리아 연출가들 특유의 무용수 사용으로 막이 시작하기 전 소프라노와 함께 음악 없는 상징적 무용을 보여줬다. 다만 무용이 군더더기처럼 보여 아쉽기도 했다. 빠른 무대전환과 마지막 아미나의 옥상 베란다 씬의 시각적 효과에는 갈채를 보낼 만했다. 이번 <몽유병여인은 >음악과 무대, 성악가와 지휘자,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모두 '절제의 미덕'으로 벨리니의 충만한 아름다움을 수행한 역작이었다.
절제를 통한 벨칸토의 진정한 아름다움, 도쿄 신국립극장 '몽유병의 여인'
박제성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