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네덜란드 ASML이 내년 매출 전망을 크게 낮췄다. 올해 3분기 신규 수주액은 시장 기대치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인공지능(AI)용 반도체만 잘 나가고, 모바일기기·PC용 반도체 시장은 침체된 양극화 탓이다. 특히 삼성전자 등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이 투자를 줄인 것이 ASML에 직격탄이 됐다. 반도체 업황이 상당 기간 부진할 것이란 우려가 확산하며 아시아 반도체 기업 주가는 동반 하락했다.

○“AI칩 수요만 강력”

AI 호황의 역설…'반도체 슈퍼乙'도 흔들
ASML은 15일(현지시간) 홈페이지를 통해 “2025년 매출 전망치를 300억∼350억유로(약 44조~52조원)로 잡았다”고 밝혔다. 이는 ASML의 기존 전망치인 300억~400억유로는 물론 매출 컨센서스(증권사 전망치 평균)인 358억유로에도 못 미친다. 3분기 예약 매출(신규 수주)도 26억3300만유로로 컨센서스(56억유로)의 47%에 그쳤다. 2분기 신규 수주액(55억6700만유로) 대비 52.7%나 줄었다.

ASML은 실적 전망 하향과 수주액 급감의 원인으로 ‘AI를 제외한 반도체 시장의 부진’을 꼽았다. 크리스토퍼 푸케 ASML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AI 반도체에선 강력한 성장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AI를 제외한 시장에선 회복 속도가 예상보다 더디다”며 “2025년까지 이런 분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면서 고객사들이 주문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업계에선 ‘AI 반도체 붐’이 ASML에 부메랑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반도체를 가장 잘 만드는 대만 TSMC에 주문이 몰리면서 2위권 파운드리 기업인 삼성전자와 인텔이 EUV 장비 투자를 줄인 게 첫 번째 이유다. 인텔은 지난달 구조조정을 선언하며 독일에서 진행하던 300억유로 규모의 신규 파운드리 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삼성전자도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짓고 있는 파운드리 공장 가동 시점을 2026년으로 늦추고 최근 경기 평택캠퍼스 4공장에 파운드리 라인을 설치하려던 계획을 재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파운드리 고객사가 ASML에 넣은 신규 주문액은 2분기 40억6400만유로에서 3분기 12억1100만유로로 ‘3분의 1토막’ 났다.

○“TSMC 콘콜이 향방 가를 것”

D램 기업들이 신규 투자 대신 기존 공장을 AI 서버용 고대역폭메모리(HBM) 라인으로 전환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도 ASML에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 EUV 장비를 활용한 최첨단 D램 개발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기존 제품을 패키징(여러 칩을 한 칩처럼 작동하게 하는 공정)해 만드는 HBM 생산을 늘리는 데 주력한 탓에 주문이 줄었다는 얘기다. 푸케 CEO는 “메모리 고객사는 증설에 소극적이고 HBM 등 AI와 관련된 수요에 대응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정부가 중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장비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것도 악재다. ASML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분기 49%에서 3분기 47%로 2%포인트 낮아졌다.

ASML의 실적 발표 영향으로 16일 삼성전자(-2.46%), SK하이닉스(-2.18%), 도쿄일렉트론(-9.19%), 디스코(-5.82%) 등 일본 반도체 장비·패키징 기업 주가가 동반 하락했다. AI 반도체를 제외한 스마트폰·PC용 반도체 업황에 대한 우려가 확산한 영향으로 분석된다.

17일 열리는 대만 TSMC의 콘퍼런스콜이 반도체 업황·주가의 가늠자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TSMC는 지난 9일 3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6.5% 증가한 236억2200만달러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콘퍼런스콜에선 웨이저자 CEO가 나와 향후 실적과 업황 전망을 밝힌다. 시장에선 300억~320억달러 수준의 올해 설비투자 규모를 줄이지 않고 반도체 업황에 대한 낙관론을 제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