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공직 진출 막는 '기형적 백지신탁'
우리나라에는 유독 기업인 출신 장관이 드물다. 노무현 정부의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박근혜 정부의 강은희 여성가족부 장관, 문재인 정부의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윤석열 정부의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등 한손에 꼽을 정도다. 재무·상무장관은 물론 노동·국무·국방장관까지 기업인 출신이 수두룩한 미국 행정부와 대조적이다.

이런 배경에 2005년 도입된 주식 백지신탁이 있다. 고위 공직자가 직무 관련성이 있는 주식(3000만원 초과)을 보유한 경우 매각하거나 수탁기관(금융회사)에 백지신탁해야 하는 제도다. 적용 대상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무위원,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공기업 사장 등으로 본인은 물론 배우자와 직계존비속 주식도 해당한다. 수탁기관은 60일 이내에 해당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 말이 신탁이지 실제로는 ‘강제 처분’을 의무화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 중소기업청장에 지명된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내정 3일 만에 사퇴하면서 “주식과 경영권을 한두 달 안에 처분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토로했다. 이 징벌적 제도 탓에 기업 지배력을 유지해야 하는 대주주는 공직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원천 봉쇄됐다. 미국의 백지신탁(블라인드 트러스트) 역시 공직자 이해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취지지만 여러 선택지 중 하나다. 직무 회피 등 다른 수단을 충실히 이행하면 면제되고, 백지신탁을 하더라도 처분을 강제하지 않는다.

문헌일 서울 구로구청장이 취임 2년여 만에 물러나면서 백지신탁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본인이 창업해 오랫동안 운영해온 회사 주식 4만8000주(평가액 170억원대)에 대한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의 신탁 결정에 불복해 소송을 냈지만 패소한 끝에 자진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청장이 돈 많은 사람의 취미 활동이냐”는 비판이 거세지만, 기형적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보유 주식을 족쇄로 공직 진출을 막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취임 후 주식을 신탁하되 퇴임 후 돌려받는 보관신탁제 등 유연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손질해야 한다.

유병연 논설위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