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원 작가의 작업실은 경기도 포천에 있다.1) 그의 작업실 주소지에 도착했을 때는 대문 쪽으로 현관이 향해 있지 않아서, 주차 후 조심스럽게 건물 벽을 따라 옆으로 돌아들어 갔다. 어디선가 굴러다니던 오브제를 주워다 붙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외교관과정”이라는 팻말 옆의 문을 열고 김지원 작가가 나왔다. 밑도 끝도 없는 외교관과정 팻말에 일단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기 들어갔다 나오면 외교관 되는 건가요?” 하는 실없는 질문과 “어서 들어오세요.” 하는 화통한 대답.
김지원 작가의 작업실 입구. 뜬금없는 “외교관과정” 문패가 붙어 있다. / 사진. © 이윤희
김지원 작가의 작업실 입구. 뜬금없는 “외교관과정” 문패가 붙어 있다. / 사진. © 이윤희
김지원, <맨드라미>, 2018, 린넨에 유채, 228 x 182 cm
김지원, <맨드라미>, 2018, 린넨에 유채, 228 x 182 cm
김지원은 일명 ‘맨드라미 그림’으로 알려진 화가이다. 어떤 소재나 화풍으로 알려졌다는 것은 그만큼 대중적 호소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길게 구불거리는 붓질과 강렬한 색들의 조합이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화가의 내면을 드러내듯이, 김지원의 툭툭 던지는 듯한 필치의 맨드라미는 그만의 독특성이 담겨 있다.

하지만 맨드라미 그림‘만’을 볼 것이었으면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하는 전시를 찾아 전시용 조명 아래서 관람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작업실에서 보고 싶은 것은 그의 전시를 볼 때 잔잔하게 느껴져 오던 소탈한 유머, 그리고 작가가 은밀하게 누리는 작은 재미의 요소들이었다. 그의 작업실에 들어서기 전에 먼저 그의 작업실 그림을 한 점 보고 가자.

그가 자신의 작업실을 소재로 그린 <비행>(2014)은 작가들이 자화상을 대신하여 남긴 수많은 작업실 그림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그림 속에는 작업실의 흰 벽면에 걸려있거나 기대어놓은 다른 작품들이 부분적으로 보인다. 김지원을 대표하는 맨드라미 그림이 화면 아래쪽에 약간만 보이게 배치되었고, 또 다른 주요 모티프인 항공모함 그림이 왼편에 부분적으로 보인다.
김지원, <비행>, 2014, 린넨에 유채, 228 x 182 cm
김지원, <비행>, 2014, 린넨에 유채, 228 x 182 cm
이 하얀 화면에 초현실적인 공간감을 부여하는 것은 다양한 비행기들2) 의 움직임과 구불거리는 선들이다. 빠른 붓질은 이 불안한 화면에 더한 생동감을 부여하는 요소이다. 마치 붓을 든 김지원이 그때 그 캔버스 앞에 ‘실존’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제시된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그림 앞에 서서, 그린다는 행위는 무엇인가, 그림이란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는가, 끝도 없는 질문과 대답을 흔적처럼 남긴 것이 아니었을까.
김지원 작업실의 부분, 2024 / 사진. © 이윤희
김지원 작업실의 부분, 2024 / 사진. © 이윤희
그의 그림에는 가끔 검은 옷을 입은 작은 남자가 등장한다. 이 남자는 거인국의 소인처럼 맨드라미꽃 뒤에 쏙 숨기도 하고 큰 나무 위에 오르기도 하며 하늘을 날기도 한다. 인간의 신체조건으로는 실현되기 어려운 일을 그림 속에서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남자는 물론 김지원 작가이지만, 실제의 김지원보다 훨씬 자유롭다.

<낭만풍경>(2008)에서 검은 옷의 남자는 작은 암초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다 가운데 바위에 올라앉는 일은 현실에서 불가능하지만, 이 그림은 한계를 벗어나는 순간을 생생한 감각적 체험으로 전달한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몸을 휘감는 것 같고, 오롯이 혼자라는 느낌에 살짝 몸서리가 쳐지는 듯도 하다. 그림 앞에서, 미루고 미루었던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대면하고 싶지 않은, 답도 없는 질문들이 밀려오는 것 같다. 김지원의 어떤 그림들은 너무 쉽게 관객을 미혹시킨다. 대충 보려고 했는데 오래 발걸음을 붙들어 맨다.
김지원, <낭만풍경>, 2008, 린넨에 유채, 228 x 118 cm
김지원, <낭만풍경>, 2008, 린넨에 유채, 228 x 118 cm
특히 그의 드로잉 작품들이 그렇다. 그는 드로잉 작업이 많은 작가이다. 그리고 드로잉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작가이다. 무려 그는 볼펜으로 드로잉을 한다. 연필도 만년필도 아니고 볼펜으로 말이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미술의 도구라고 볼 수조차 없는 볼펜은, 잡히면 아무 도구나 드로잉의 매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3) 이 볼펜 스케치에 채색한 드로잉 작품들에서는 독특한 박진감이 느껴진다.
드로잉 작품들을 넘겨보는 김지원 작가 / 사진. © 이윤희
드로잉 작품들을 넘겨보는 김지원 작가 / 사진. © 이윤희
예컨대 김지원이 ‘뉘앙스 있는 개’라고 명명하는, 어쩌다 그의 눈에 들어온 개를 그린 드로잉들은, 개를 실제로 보지 못했어도 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살아가며 수없이 보아 왔던 익명의 시골 강아지들 가운데 어느 한 마리가 천연덕스럽게 그림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어떤 개는 <무제>(2018)에서처럼 유화 작업에 픽업되어 번듯한 그림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유화라고는 하지만 묘사의 방식에서 역시 드로잉 특유의 현장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왼쪽) 김지원의 ‘뉘앙스 있는 개’ 드로잉, 종이에 볼펜, 수채, 2009, (오르쪽) 김지원, <무제>, 2018, 린넨에 유채, 41 x 32cm
(왼쪽) 김지원의 ‘뉘앙스 있는 개’ 드로잉, 종이에 볼펜, 수채, 2009, (오르쪽) 김지원, <무제>, 2018, 린넨에 유채, 41 x 32cm
몇 시간 동안 푹 빠져 그의 드로잉 작품들을 넘겨보다가, 이러다 하루가 다 가겠다는 반성이 들 무렵, 문득 맨드라미 작품들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맨드라미꽃은 생명에 대한 의지 그 자체인 양 힘껏 피고 진다. 구불구불한 모양이나 뻗어나가는 양상이 규칙적이면서도 불규칙해서 오히려 전형성을 자유롭게 탈피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맨드라미는 초록이 무성한 여름을 배경으로 할 때도 있지만, 그 생명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겨울의 모습도 있다.
김지원 <맨드라미>, 2019, 린넨에 유채, 100x100cm
김지원 <맨드라미>, 2019, 린넨에 유채, 100x100cm
겨울의 맨드라미는 힘 닿는 데까지 억척같이 살다 꼿꼿하게 끝을 맞이한 사람처럼 여한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풍경은 말할 수 없이 쓸쓸하다. 왜 김지원에게는 맨드라미가 눈에 들어왔을까, 하는 질문이 늘 있었다. 여러 해의 모든 계절을 돌아, 손바닥만한 그림으로부터 압도적인 크기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맨드라미는 김지원에게 그림의 코기토(cogito)4)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에서 존재의 바닥을 확인했듯이, 화가로서 ‘왜 그리는가’, ‘그림은 왜 있는가’, ‘그림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에 맞닥뜨린 마지막 확인 같은 것 말이다. 붓질처럼 자유로운 맨드라미, 언제 보아도 달라 보이는 맨드라미를 매양 똑같은 캔버스 위에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은, 그리는 자로서의 존재 확인처럼 보인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의 맨드라미를 더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김지원 작업실 마당에 핀 맨드라미 / 사진. © 이윤희
김지원 작업실 마당에 핀 맨드라미 / 사진. © 이윤희
이윤희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1) 포천 이전에는 안성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11년간 머물렀던 안성 작업실 일대가 골프장으로 강제수용되면서, 그는 법적으로 맞섰다. 공공시설이나 도로를 만들기 위한 강제수용이 아니라 개인사업자의 골프장을 짓는데 토지수용이 강제성을 갖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은 골프장 사업자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는 자택을 고정으로 놓고 컴퍼스로 동그라미를 그렸을 때 가용한 지역 중 한 곳으로 포천을 골랐다.

2) 항공모함과 비행기는 김지원이 지속적으로 매혹되어 있는 소재들이다. 그중에서도 비행기는 그의 작품 이력에 돌출적으로 등장한다. 맨드라미와 비행기는 얼마나 다른 소재인가. 그는 소재의 들쭉날쭉함에 거침이 없다. 그는 캔버스 틀, 그러니까 천을 받치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 나무틀을 가지고 스스로 커다란 비행기를 만들기도 했다. 작업실의 벽 한 면을 그린 <비행>(2014)에도 나무틀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비행기가 얼핏 보이는데, 이는 실제 작업실의 풍경과 심상적인 풍경이 겹쳐 있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3) 김지원은 볼펜의 지워질 수 없다는 속성, 그러니까 한 번 그은 선을 수정할 수 없다는 특성 때문에 볼펜을 선호하지만, 방명록에 사용하는 붓펜과 간단한 수채의 도구 등 여러 매체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4) ‘두비토, 에르고 코기토, 에르고 숨(dubito, ergo cogito, ergo sum)’, 즉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명제로,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는, 존재의 실재를 확인하는 사유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