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계의 뉴웨이브...질발로디스의 '플로우'
지난 10월 4일 부산국제영화제(BIFF) 오픈 시네마 부분으로 상영된 애니메이션 '플로우'(2024)는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Show, Don’t tell)라는 격언을 실감하게 만든 작품이다. 영화는 무언가(無言歌)처럼 대사 없이 시각과 사운드만으로 85분을 채운다.

플로우는 라트비아의 떠오르는 애니메이션 감독 긴츠 질발로디스(30)의 두 번째 장편으로 올해 5월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서 공개됐다. '애니메이션계의 칸'으로 인정받는 안시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는 올해 감독상, 음악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영화 배경은 종말이 가까워진 세상. 폐허가 된 원형 극장, 방치된 조각상…. 인간은 모두 사라지고, 동물들만 남아있다. 그러던 중 찾아온 거대한 홍수는 순식간에 동물들의 터전을 집어 삼킨다. 혼자 조용히 살아오던 회색 고양이는 집을 잃고 다른 동물들과 조각배를 타고 생활하게 된다. 개인주의자 고양이가 자연재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단체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영화에는 고양이를 비롯해 리트리버, 여우원숭이, 카피바라, 뱀잡이수리 등 여러 동물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대사없이 '야옹' '멍멍' 같은 울음소리만 낸다. 대신 눈동자의 크기, 표정 근육, 동작 등 비언어적 소통법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영화는 이런 그 동물만이 지닌 고유의 비언어적 표현을 최대한 우아하고 정교하게 담아낸다.

한배를 탄 이종(異種)의 동물들은 뚜렷한 개성을 지녔다. 겁 많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회색 고양이와 그런 고양이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리트리버의 모습은 보편적인 개와 고양이의 관계성을 보여줘 웃음을 자아낸다. 카피바라는 위기의 상황임에도 굼뜨고 평화로우며, 여우원숭이는 반짝이는 물건을 좋아하고 물욕이 많다. 동물들은 소소한 갈등을 벌이기도 하지만, 자연 재해라는 위기 앞에 서로 협력하고 연대한다. 우아하고 긴 카메라워크는 다채로운 자연 속 동물들의 여정을 한층 숭고하게 만든다. 현악기, 타악기 등 어쿠스틱 악기를 중심으로 한 배경 음악은 생동감을 더한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보다 우아하게 나이들어간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예전 애니메이션을 계속 보잖아요. 애니메이션에는 시대를 초월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긴츠 질발로디스)

플로우는 라트비아의 신예 감독인 질발로디스의 두 번째 장편이다. 질발로디스는 "모든 작업을 혼자서 하다가 처음으로 팀과 작업하면서 겪은 경험을 고양이의 모습에 담았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질발로디스 감독은 그의 첫 장편 '어웨이'(2019)에서 모든 작업을 혼자 했다.
애니메이션계의 뉴웨이브...질발로디스의 '플로우'
어릴 때부터 상상하는 것을 즐겼던 그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지만, 영화보다 상상과 표현의 범위가 훨씬 넓은 애니메이션에 끌렸다. 그는 "실사 영화를 만들려고 해보니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사이에서 한계를 느꼈다"며 "애니메이션에 집중하기로 한 이유"라고 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제 머리 속에 떠오르는 모든 설정으로 스토리를 만들고 구체화할 수 있었어요. 이를테면 '플로우'에는 물이 많이 등장하고 카메라와 캐릭터의 동작이 매우 복잡해요, 그걸 또 동물들이 해야하죠. 실사로는 제작이 불가능하지만 애니메이션으로는 가능해요."

플로우의 그림체는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단순하지만 서정적이다. 숲, 물 같은 자연 풍경 묘사는 일본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연상되기도 한다. 질발로디스는 보편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처럼 손으로 그린 스토리보드를 활용해 제작하는 대신 3D 프로그램을 활용해 제작했다고 털어놨다 프로그램으로 배경을 간단히 만든 뒤 캐릭터를 배치해 버추얼 카메라로 탐색하는 방식이다.
애니메이션계의 뉴웨이브...질발로디스의 '플로우'
"플로우에서 카메라가 등장 인물을 따라가는 롱숏을 많이 사용했어요. 관객의 몰입감을 극대화하도록요. 카메라가 계속해서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기존 제작 방식으로는 어려웠어요. "

플로우를 비롯해 그의 작품 중 대다수는 대사가 없다. 질발로디스는 대사를 생략하는 대신 움직임, 색감, 음악, 효과음 등 다른 시각적 도구를 활용하는 시각적 스토리텔링에 집중했다.

"요즘에는 화면을 보지않고 대사만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영화, 시리즈물이 많아요. 그와 반대되는, 대사에 의존하지 않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대사가 아닌 다른 요소들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오히려 독창적이고 파격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영화 음악 또한 대략적인 스케치를 하듯 본인이 먼저 만들어 놓는다. 장면에 어울리는 기존의 영화 음악을 임시로 넣어두고 작업하는 보편적인 방식 대신 본인이 직접 음악의 초안을 만드는 것이다.

"음악을 아주 일찍 쓰는 편입니다. 대본을 쓰는 동안에 시작할 때도 있어요. 음악은 장면의 분위기와 속도를 찾아줄 뿐 아니라 스토리 전개에 대한 아이디어를 줘요. 제가 작곡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어서 제 초안을 보고 전문 작곡가 리하르트 자투페(Rihards Zaļupe)가 악보를 완성해줬어요."

최다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