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 뛰어든 '빛을 주름잡는 한지 공예가' 권중모를 만나다
옷에 주름이 가득 잡혀있다. 햇빛을 받고 걸어가면 바닥에 옷의 그림자가 비친다. 주름의 모양대로 시시각각 그림자는 달라진다. 주름진 옷감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인간 조명'이다. 스카프에도, 블라우스와 원피스에도, 스커트에도 모두 각기 다른 주름이 잡혔다. 어떤 모양의 주름을 입느냐에 따라 인간이 만드는 빛의 궤적도 달라진다. 이 모든 의상은 '빛을 주름잡는 작가' 권중모(42)가 르베이지와 함께 만든 컬렉션이다.

지난해 르베이지가 권중모와 함께 '주름 컬렉션'을 처음 선보이자마자 패션계는 뜨겁게 반응했다. 3번째 시즌을 거치며 공개되는 족족 의상과 소품이 '완판'되며 인기를 몰았다. "한국의 이세이 미야케가 나타났다"는 특급 칭찬이 쏟아지곤 했다. 하지만 권중모는 호들갑 섞인 칭찬에도 동요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자신을 알게 되었든, '한지 공예가'라는 정체성만이 그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완연한 가을 바람이 불던 날, 권중모의 디자인 컬렉션이 가득한 한남동 ZIP739에서 그를 만났다.

패션에 뛰어든 '빛을 주름잡는 한지 공예가' 권중모를 만나다
권중모에게 스스로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자 "나는 한지를 가지고 조명을 만드는 디자이너다"라는 간단명료한 답변을 내놨다. "그게 전부냐"라는 반응에도 "이것보다 나를 잘 나타내는 표현은 없다"며 웃음지었다. 그의 소개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전문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다. 한지라는 소재를 사용해 전통 조명을 만드는 공예가다. 한지에 주름을 잡은 뒤 조명에 설치시켜 빛을 쏜다.

그의 작업에 있어 한지는 전부와도 같다. 권중모와 한지의 만남은 스페인 유학 생활을 거치며 이뤄졌다. 그는 “스페인에서 다른 나라 유학생들을 많이 만났는데, 각 나라마다 정체성과도 같은 소재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며 “핀란드는 자작나무라는 소재를 써서 가구를 만들고, 가죽이 유명한 스페인은 가죽공예가 발달한 모습을 보며 전통적으로 쌓여 온 소재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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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모는 ‘한국의 정체성이 될 만한 소재가 무엇인가’를 놓고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러다 한지를 찾아냈다. 그는 “한지만큼이나 한국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소재는 또 없다고 생각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연약한 종이라는 한지의 특성상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었던 것. 권 작가는 “고민이 거듭되던 중에 전통 창호를 보고 영감이 떠올랐다“며 "한지가 투명하지 않지만 빛이 투영되지 않나. 그 지점에 꽂혀 조명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했다.

그가 쓰는 한지는 일반적이지 않다. 모두 르베이지의 옷처럼 주름이 잡혀 있다. 권중모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는 ‘이중 주름 기법’이다. 권 작가는 “조명 만드려는데, 뻣뻣한 일반 한지를 쓰니 민속촌이나 옛 주막에서 쓸 법한 ‘촌스러운’ 모습밖에 구현되지 않았다“고 했다. 원하던 빛의 음영이 구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러다 우연히 한지 몇 장을 겹치고 접는 시도를 하게 됐는데, 빛을 비추니 겹친 종이만큼 빛의 농도와 색이 달라지는 게 보였다”며 “이후에는 수백 번이고 한지를 접어보며 빛의 농도를 조절하다 주름 패턴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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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한지 공예를 하는 권중모는 놀랍게도 스페인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현지에서 노선을 바꾸게 된 것이다. 이유를 묻자 그는 "전문적인 산업 브랜드 회사 속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아니라 독립 디자이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을 내놨다. 이어 “산업디자인의 특성상 디자이너 홀로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찍어낼 수 있는 환경이 안 됐는데, 외부 인력 없이 대학생인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디자인이 뭘까 고민하다 공예 디자인의 세계에 눈을 돌렸다”고 했다.

또 유럽에서 ‘산업디자인’이라는 개념에 대해 완전히 달리 인식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그는 “한국은 전자제품이나 대형 기기를 찍어내는 걸 산업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유럽에서는 소파나 조명 등 집에 있는 모든 걸 다 산업디자인의 범주로 여긴다”며 “그걸 깨닫자 나도 뭔가를 기계적으로 찍어내는 것 말고 실생활에 쓰이는 것 모두를 산업디자인으로 여기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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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권중모의 삶에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빠질 수 없는 존재다. 그는 “스페인에서 생각하는 범주를 키웠다”며 “나무의 디테일만 보다가 숲을 보게 됐고, 또 큰 숲을 보다가 나무 속 벌레를 보는 생각의 전환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여러 국가에서 모인 예비 디자이너들을 만나며 인간의 취향에 대해서도 깨닫는 계기가 됐다. 권중모는 ”정말 이상해 보이는 아이디어가 실사화 후 각광받고, 완벽한 다자인의 완성본이 이상할 수도 있다는 걸 보며 스스로 '과연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이상한걸까'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문 공예가로 자리잡은 그에게도 의상 디자인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권중모는 "조명과 달리 움직임이 있는 소재라는 점이 가장 어려웠다"며 "3번이나 시즌을 하다 보니 이전과 매번 주름을 다르게 잡아야 한다는 점도 새로웠다"고 말했다. 여기에 르베이지의 정체성도 중요시 여겼다. 그는 “토종 브랜드로 오래 자리잡고 있는 르베이지만의 시그니처, 고유성을 드러내보이고 싶었다”며 “기교 대신 브랜드가 가진 소재의 탁월함 등을 선보이는 데 주목했다”고 했다. 이번 시즌 컬렉션에서 작은 단추 디테일을 신경쓴 것도 이 때문이다.

의상 디자인을 할 때도 ‘빛’에 집중했다. 한지 조명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을 옷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옷들은 소재 덩어리로 움직이는데, 나의 옷은 주름을 따라 분해되고, 입은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음영이 생긴다"고 했다. 원단과 소재마다 다르게 주름을 잡은 것도 모두 움직임과 빛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권중모는 "그래서 내 르베이지 컬렉션은 사람이 입어야 비로소 완성작이 된다"고 했다. 움직임이 없는 사진이나 마네킹으로는 빛이 만들어내는 옷의 매력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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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베이지는 권중모의 조명에 영감을 받고 먼저 협업을 의뢰했다. 명동 매장인 ‘살롱 드 르베이지’에서 조명을 판매하자는 제안을 한 것. 권중모의 답은 ‘거절’이었다. 그는 "위탁판매는 싫고, ‘르베이지스럽게’ 새로운 걸 만들면 하겠다"고 했다. 르베이지는 그의 답을 듣고 ‘조명 전시’ 아이디어를 내놨다. 전시에 내놓은 그의 조명은 큰 인기를 얻었다. 르베이지가 '본격적인 의상 콜라보를 해보자'고 제안한 것도 그때부터다.

르베이지와 함께한 의상 디자인은 권중모의 작업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됐다. 그는 "의류 디자인 프로세스가 다른 장르보다 훨씬 빠르다는 걸 알게 됐다"며 "시즌마다 발빠르게 트렌드를 따라가고 고민하는 과정이 새로웠다"고 했다. 한 시즌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시즌을 준비한다. 디자인 구상에서 옷이 나오기까지 6개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힘들고 정신없는 작업을 겪으면서도 권중모는 패브릭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언젠가 천으로 뭔가를 해보게 된다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에게 있어서는 영역의 확장이었다”고 했다. 이어 “내 인생에서 상상도 해본 적 없던 패션과의 협업을 순탄히 하며 나의 디자인을 적용하는 과정에 대해 배운 게 많다”고 말했다.

패션에 뛰어든 '빛을 주름잡는 한지 공예가' 권중모를 만나다
그는 일반 대중과 고객들에게 “내 주름이 옷으로 구현됐다는 것에 놀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명과 달리 옷은 움직이기 때문에 누가 입느냐, 또 어떻게 입고 돌아다니느냐에 따라서 매번 다른 이미지가 된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르베이지와의 프로젝트를 통해 ‘퀘스트를 깬다’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고 했다. 권중모는 “게임에서 미션을 깨듯 새 영역을 깨나가는 게 즐겁다”며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도호와 박서보 등 평소 좋아하던 거장들처럼 멋진 작가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또 작가로서 욕심도 생겼다. 그는 “지금까지 해오던 건 당연히 계속할 테지만, 다른 영역에 조금씩 욕심이 생긴다”며 “천천히 계속 발전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