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으로 건물주 된다더니…" 정부 믿고 있다가 '풍비박산'
“몇천원만 투자해도 값비싼 미술품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캐치프레이즈로 ‘미술품 조각투자’ 플랫폼을 개발해 전국에서 자금을 끌어모은 스타트업 A사는 2년 넘게 돈을 벌지 못하고 투자금을 까먹으며 버티고 있다. 국회가 법을 개정해야 제도화가 가능한데 개정안이 발의조차 안 됐다. 조각투자를 제도화하겠다는 금융위원회의 말을 믿고 사업을 키운 게 화근이었다.

‘소액 건물주’ 콘셉트로 주목받은 부동산 조각투자 스타트업 B사는 수개월 전 아예 사업을 접었다. 회사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가 됐고, 홈페이지와 홍보용 인스타그램은 방치 중이다. 2~3년 전만 해도 우리 자본시장의 새로운 획을 긋는 혁신 산업이 될 것이라던 조각투자는 요즘 풍비박산이 났다. 조각투자 기업 수십 곳이 사업을 접거나 해외로 나갔다. 국회에서 2년 넘게 법 개정이 미뤄져 시장이 죽어버린 영향이다.

○정부 ‘2차 거래’ 허용 소식 감감

18일 증권가에 따르면 조각투자 기업 중 규제샌드박스 대상으로 지정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내 사업을 잠정 중단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조각투자를 토큰증권(ST) 방식으로 제도화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고, 이번 국회에서는 발의조차 안 됐다.

2022년 4월 금융위는 국회 입법을 통한 제도화를 전제 조건으로 조각투자 규제샌드박스(혁신금융서비스)를 도입했다. 하지만 기존에 해오던 조각투자 상품의 2차 거래(최초 청약 이후에 하는 투자자 간 거래)를 금지하면서 시장이 위축됐다. 정부와 국회가 후속 입법을 통한 2차 거래 허용을 약속했지만 차일피일 미뤄졌다. 현재는 규제샌드박스 대상으로 선정된 일부 기업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한 조각투자 기업 대표는 “국내 사업이 지지부진해 ST가 제도화된 싱가포르에서 상품을 발행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며 “투자자의 돈을 가만히 축내고 있을 수 없어 뭐라도 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했다. 다른 조각투자 기업 대표는 “기존에 하던 다른 사업이 있어서 거기에 집중하고 있고 조각투자는 잠정 중단했다”고 말했다.

○제도화 추진 뒤 시장 풍비박산

다른 조각투자 기업 대표는 “ST 제도화가 늦어지다 보니 블록체인 기술로 실물자산을 토큰화한 이른바 실물연계자산(RWA)으로 조각투자 상품을 발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RWA는 증권사 등 제도권에서는 취급하지 않고 법적인 보호도 받을 수 없어 일반 투자자가 접근하기 어렵다”고 했다. 업계 관계자는 “제도화 추진 뒤 시장이 살아난 게 아니라 되려 몇십분의 1로 축소됐다”며 “양당의 대선·총선 공약에 관련 시장 법제화가 있었지만 선거철만 지나면 다들 손을 놓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일부 기업은 규제샌드박스 대상으로 지정돼 비즈니스를 하고 있지만 이런 곳은 극소수다. 지금까지 부동산 조각투자 기업 루센트블록, 세종텔레콤, 카사코리아, 펀블 등 네 곳이 규제샌드박스 대상으로 선정됐다. 음원 분야에서는 뮤직카우가 대상이 됐다.

○“시장 급성장 전망…제도화 시급”

물론 샌드박스 지정을 안 받아도 조각투자 상품을 발행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기업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발행한 상품은 기초자산이 청산될 때까지 2차 거래가 안 된다. 이를테면 미술품의 경우 누군가에게 팔린 뒤에야 수익을 실현할 수 있다. 자칫 수년, 수십 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까닭에 미술품 조각투자 기업은 최근 활동이 잠잠해졌다. 얼마 전 공모한 조각투자 상품은 청약 미달이 나 전체 물량의 20~30%(선배정 물량 포함)를 발행사가 떠안았다.

국내 상황과 달리 해외에서는 ST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

보스톤컨설팅그룹에 따르면 글로벌 ST시장은 올해 1조5000억달러에서 2030년 16조1000억달러(약 2경2000조원)로 커질 전망이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