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양극화 해소'에 숨은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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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불분명한 '정치적 수사' 남용돼
상대적·절대적 격차, 혼동 말아야
유경준 前 통계청장
상대적·절대적 격차, 혼동 말아야
유경준 前 통계청장
‘양극화 해소’나 ‘격차 해소’ 같은 표현은 민생을 돌본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보수와 진보 또는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에서 애용했다. 그러나 이들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정책적 함의를 갖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막연하게 민생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의례적인 정치적 수사(修辭)로만 사용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 용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이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포퓰리즘의 시작이다. 즉, 제대로 된 정책과 성장의 담론은 실종되고 반시장적인 정책과 기업 및 사회의 발목만 잡는 엉뚱한 규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선 이들 용어는 ‘소득’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진짜 중요한 실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릴 수 있다. 다음의 예를 생각해 보자. 연간 소득이 1000만원인 가구 A와 연 소득이 2000만원인 다른 가구 B, 두 가구로 구성돼 전체 총소득은 3000만원인 사회가 있다. 그리고 이 사회는 1년 사이에 두 배로 성장해 두 가구의 총소득은 6000만원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A는 2200만원으로 120%, B는 3800만원으로 90% 소득이 증가했다고 가정하자. 그럼 이렇게 변화한 사회를 규범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맞을까?
겉보기에는 A와 B 모두 아무런 불만이 없는 바람직한 변화로 보인다. 경제가 두 배로 성장했고, 경제 구성원인 두 가구의 소득도 모두 크게 늘었으며, 상대적인 소득격차도 처음 2배(1000 대 2000)였다가 1.7배(2200 대 3800)로 완화돼 불평등이 개선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준에 따라 이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즉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 기준으로 소득의 ‘절대적’ 격차(소득 양극화)를 잣대로 평가하는 경우, 첫해 A·B 두 가구의 절대적 소득격차는 1000만원이었지만, 경제가 두 배 성장한 그다음 해는 절대적 소득격차가 1600만원으로 커졌다. 마음먹기에 따라 나도 땅을 샀지만, 사촌이 더 비싼 땅을 사서 배 아픈 불행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더불어 이 두 가구가 왜 처음부터 소득이 1000만원과 2000만원으로 두 배 차이가 났는지를 고민한다면 더 난감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두 가구 구성원의 학력이나 체력, 성실성 등 생산성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합리한 차별이나 기회의 불평등에 따른 것이라면 정책의 방향은 정당한 차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차별 시정과 기회의 공정에 맞춰야 한다.
엄밀히 구분하면 격차(gap)는 차이(difference)와 차별(discrimination)의 합으로 표현된다. 격차를 제대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를 가능한 한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 정당한 차이는 인정하고, 정당하지 못한 차별은 엄정히 해소하는 공정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세계 경제의 발전사에서 증명됐듯이 국가가 성장할 때 ‘상대적’ 소득 불평등은 줄 수도, 늘 수도 있다. 하지만 성장하면 ‘절대적’ 소득격차(소득 양극화)는 확대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격차를 인위적으로 줄이려는 시도는 성장을 저해했다는 점을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람직한 성장은 불평등을 줄이는 성장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동의한다. 그러나 여든 야든 보수든 진보든 정제되지 않은 용어로 국민을 현혹하고 싶어만 한다면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도 없고, 성장 그 자체를 저해하는 포퓰리즘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 용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명확하게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이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포퓰리즘의 시작이다. 즉, 제대로 된 정책과 성장의 담론은 실종되고 반시장적인 정책과 기업 및 사회의 발목만 잡는 엉뚱한 규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선 이들 용어는 ‘소득’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진짜 중요한 실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릴 수 있다. 다음의 예를 생각해 보자. 연간 소득이 1000만원인 가구 A와 연 소득이 2000만원인 다른 가구 B, 두 가구로 구성돼 전체 총소득은 3000만원인 사회가 있다. 그리고 이 사회는 1년 사이에 두 배로 성장해 두 가구의 총소득은 6000만원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A는 2200만원으로 120%, B는 3800만원으로 90% 소득이 증가했다고 가정하자. 그럼 이렇게 변화한 사회를 규범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맞을까?
겉보기에는 A와 B 모두 아무런 불만이 없는 바람직한 변화로 보인다. 경제가 두 배로 성장했고, 경제 구성원인 두 가구의 소득도 모두 크게 늘었으며, 상대적인 소득격차도 처음 2배(1000 대 2000)였다가 1.7배(2200 대 3800)로 완화돼 불평등이 개선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준에 따라 이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즉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 기준으로 소득의 ‘절대적’ 격차(소득 양극화)를 잣대로 평가하는 경우, 첫해 A·B 두 가구의 절대적 소득격차는 1000만원이었지만, 경제가 두 배 성장한 그다음 해는 절대적 소득격차가 1600만원으로 커졌다. 마음먹기에 따라 나도 땅을 샀지만, 사촌이 더 비싼 땅을 사서 배 아픈 불행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더불어 이 두 가구가 왜 처음부터 소득이 1000만원과 2000만원으로 두 배 차이가 났는지를 고민한다면 더 난감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두 가구 구성원의 학력이나 체력, 성실성 등 생산성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합리한 차별이나 기회의 불평등에 따른 것이라면 정책의 방향은 정당한 차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차별 시정과 기회의 공정에 맞춰야 한다.
엄밀히 구분하면 격차(gap)는 차이(difference)와 차별(discrimination)의 합으로 표현된다. 격차를 제대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를 가능한 한 구분해야 한다. 그래야 정당한 차이는 인정하고, 정당하지 못한 차별은 엄정히 해소하는 공정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세계 경제의 발전사에서 증명됐듯이 국가가 성장할 때 ‘상대적’ 소득 불평등은 줄 수도, 늘 수도 있다. 하지만 성장하면 ‘절대적’ 소득격차(소득 양극화)는 확대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격차를 인위적으로 줄이려는 시도는 성장을 저해했다는 점을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바람직한 성장은 불평등을 줄이는 성장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동의한다. 그러나 여든 야든 보수든 진보든 정제되지 않은 용어로 국민을 현혹하고 싶어만 한다면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도 없고, 성장 그 자체를 저해하는 포퓰리즘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