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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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말 국가 에너지 대계인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수립되는 가운데 인공지능(AI) 최적화 기술로 이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력거래소 핵심 관계자는 20일 “전력수급계획의 틀이 아직도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며 “소형모듈원전(SMR) 등 미래 에너지 공급원을 감안해 전력수급계획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전력수급계획은 수십~수백만 개 이상 변수로 구성된 함수를 다양한 제약 조건 아래에서 푸는 수학적 최적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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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력수급계획에 따르면 국가 총발전량에서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올해 약 9%에서 10여 년 뒤인 2036년 30.6%로 급증한다. 문제는 날씨에 따른 변동성이 극심한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이렇게 높아지면 수급 예측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전력 시스템이 풀어야 할 함수의 외생변수(파라미터)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현재 9% 안팎인 신재생에너지만으로도 수급 예측 오차가 적지 않다. 전력업계 분석에 따르면 지난 15일 전력거래소가 전날(14일) 예측한 수요와 당일 실수요 간 오차는 최대 15%(9000㎿)에 달했다. 1000㎿ 대형 상용원전 9대 출력에 해당하는 수치다.

국가 핵심 산업으로 성장한 2차전지 성능도 최적화가 결정한다. 핵심 소재인 양극재의 성능은 니켈, 코발트, 망간 등 30여 가지 원료를 어떤 비율로 조합해 최적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적화 결과물에 따라 충전 시간과 주행거리, 용량, 안전성 등이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적화 값을 생산량으로 오차 없이 연결하는 스마트 공장을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 구축하기 위해 올해 들어 CDO(최고디지털책임자) 조직을 기존 100여 명에서 600여 명으로 대폭 확대했다.

수학적 최적화와 동전의 양면인 AI 기술 발전에 따라 최적화 소프트웨어(SW) 수요는 전 산업에서 급증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전쟁 중심인 우주·항공을 비롯해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 역시 최적화가 성패를 가른다. AI, 바이오와 함께 윤석열 정부가 3대 게임체인저로 꼽은 양자 기술도 최적화와 직결돼 있다.

해외에서는 수학적 최적화를 통한 산업 난제 해결을 비즈니스 모델로 내세우는 기업까지 등장했다. 최적화 SW 분야 세계 1위 기업인 페어아이작(FICO)은 수학을 활용해 HSBC, 존슨앤드존슨, 프록터앤드갬블(P&G) 등을 돕고 있다. 이 기업의 주가는 AI 열풍에 힘입어 지난 2년간 500% 이상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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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NCMA’ 계열 2차전지 양극재는 니켈, 코발트, 망간, 알루미늄만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 수산화나트륨 등 30여 개 재료를 추가로 조합해야 한다. 30여 개 재료 조합의 가짓수가 1000개라고 치면, 1000개 각각을 양극재 성능과 매칭해 다차원 함수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엔 완성차 고객사의 다양한 요청 사항 등 제약 조건이 포함된다. 이런 함수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최대한 빠르게 풀어 총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 같은 과정을 수학적 최적화라고 한다. 국내에서 최적화 기술을 선도하는 LG그룹 DX(디지털 전환) 전담 기업 LG CNS의 관계자는 20일 “자본이 집약되는 첨단 장치산업에서 수학적 최적화 소프트웨어(SW)의 가치가 치솟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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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구조가 갈수록 복잡해지는 추세도 최적화 수요를 견인하고 있다. 검사, 패키징 등 반도체 후공정은 최적화가 필수다. 웨이퍼 한 장에서 나오는 수백, 수천 개의 칩을 어떤 경로로, 어느 좌표에, 어떤 순서로 옮겨야 단위 공정당 시간과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를 최적화 SW가 계산해 준다. 저전력 차세대 인공지능(AI) 반도체인 상보형 전계효과 트랜지스터(CFET)에서도 최적화가 가장 중요한 기술로 꼽힌다. 스마트폰 화질을 결정하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증착 공정에서도 최적화 SW가 사용된다.

최적화를 달성하려면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수학적으로 설계된 AI 알고리즘에 넣어 돌려야 한다. 이 과정에는 막대한 컴퓨팅 파워가 필요하다.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아마존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최근 앞다퉈 소형모듈원전(SMR) 기술 보유 기업에 투자하는 배경이다. SMR은 송·배전 인프라 없이 기업이 보유한 공장 근처에 지어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지난 6월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SMR 등을 회사 주변에 지을 길이 열렸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태양광 등 일부 재생에너지의 소규모 거래를 제외하면 여전히 전력거래소가 전력 공급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력수급계획은 국내총생산(GDP)과 인구 추이, 기상 예측 데이터 등을 중심으로 수십만~수백만 개 이상 변수로 이뤄진 최적화 함수를 송·배전망 상황, 예비력 등 수많은 제약 조건하에 푸는 것이다. 지난해 10차 전력수급계획에 명시된 2036년 기준 전력 소비량 597.4TWh(테라와트시), 하계 기준 최대 전력 118GW(기가와트)는 이런 과정을 거쳐 산출됐다.

전력수급계획은 원전, 석탄화력, 액화천연가스(LNG) 등 발전소 각각을 어디에, 언제, 어떤 용량으로 지을지 정하는 ‘전원계획’과 발전소 기동 여부(온·오프)를 결정하는 ‘발전계획’ 두 가지로 나뉜다. 전원계획은 혼합정수계획법(MIP)이라는 수학적 최적화를 거쳐 수립한다. 세계 최대 로봇 기업이자 변압기 시장 1위 기업인 스위스 ABB의 스케줄링 프로그램과 미국 뉴욕거래소 상장 기업 페어아이작(FICO), 구로비 등의 수학적 솔버(solver)를 사용한다. 발전계획을 세울 땐 제너럴일렉트릭(GE)의 스케줄링 프로그램과 IBM의 솔버 C플렉스 등이 쓰인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과 국제 사회의 2050년 탄소중립 결의 등에 따라 신재생에너지 접속 계통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전력수급계획의 불확실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현재 전력수급계획에 따르면 2036년 총발전량 667.3TWh에서 신재생에너지는 204.4TWh로 비중이 30%를 넘는다. 전력구매계약(PPA) 등 전력거래시장에 참여하는 기업 수는 작년 말 6333개로 문재인 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 1816개에서 3.5배로 증가했다. 대부분 태양광 사업자다.

사업자마다 발생하는 다양한 변수와 제약 조건을 감안하면 풀어야 할 함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복잡해진 것이다. 전력거래소 시스템은 중앙처리장치(CPU) 기반이어서 가짓수가 복잡한 조합 최적화 문제를 풀 수 없다. 슈퍼컴퓨터에 장착되는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등과 그에 상응하는 SW가 있어야 한다. 지역사회 반대로 송·배전망 설치가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전력수급계획을 망가뜨리는 요인이다. 하루 전 입찰, 당일 거래로 굳어진 전력 공급 구조 역시 실시간 거래로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전력수급계획엔 기업이 스스로 전기를 생산해 자급자족하고 남는 것은 다양한 경로로 팔 수 있는 ‘지역 및 기업 단위 최적화’ 개념이 들어가야 한다”며 “AI 시대 폭증하는 전기 수요를 고려해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해성/강경주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