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 제재 의결도 하기 전에 조사 사실을 언론에 먼저 알리는 건 조사 성과를 홍보하는 한편 제재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기업들의 시각이다. 검찰이 피의사실을 미리 흘리는 방식으로 피의자를 압박하는 것과 비슷한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규모가 크고 알려진 기업일수록 보도자료를 우선 뿌리고 보는 관행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공정위는 이에 대해 “의결서를 늦게 송부하는 건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보도자료 배포에 대해서는 정해진 규정이 없다”는 입장이다.
공정위, 언론에 먼저 흘려 악덕기업 낙인…사실상 '피의사실 공표'

과징금 때리고 한참 뒤 의결서 송달

공정위가 최근 몇 년 새 제재 의결 전 보도 자료를 우선 배포한 사건은 SPC(2020년), 롯데칠성음료(2021년), 대한항공·이랜드리테일(2022년), 이마트·씨제이올리브영(2023년) 등이다. 대부분 이름이 알려져 있거나 대기업 집단에 속한 경우가 많았다. 공정위는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건에 대해서는 알 권리를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5월에도 공정위는 ‘5G 인터넷 속도를 거짓·과장 광고했다’는 이유로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에 총 33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는 자료를 배포했다. 이들 3사는 보도 이후 한참 동안 의결서를 받아보지 못했다. 한 통신사 관계자는 “제재 내용을 공식적으로 받았다면 세부 내용을 검토해 즉각 반박 자료를 냈을 것”이라며 “결국 언론 보도에는 해명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제재를 심의하기도 전에 여론전을 벌인 사례도 있다. 지난 4월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한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쿠팡이 자사 임직원에게 PB 상품 구매 후기를 작성하도록 해 검색 순위 상단에 올라가도록 했다”며 “자사 우대 행위를 곧 전원회의에서 다루게 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쿠팡은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우선 보여주는 건 ‘알고리즘 조작’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박했지만, 이미 기사가 나간 뒤였다.

기업 기밀도 알 권리?

‘알 권리’라는 명목으로 우선 배포하는 보도자료에 민감한 기밀들이 포함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공정위는 기업의 부당 지원 행위 등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내용에 영업 기밀이 포함되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설명이다. 한국경제인협회 관계자는 “대중에 밝혀선 안 되는 영업 기밀이 공정위 자료 배포 과정에서 드러나 업체들이 곤란해한 사례가 적지 않다”며 “보도자료 배포 이전에 비공개해야 하는 부분에 대한 별도 의견 수렴 과정도 없다”고 지적했다.

공정위는 공개용·비공개용 의결서를 별도로 작성한다. 조사 내용 중 기업의 영업 기밀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리 업체와 조율해 민감한 정보는 비공개용 의결서에만 반영한다. 그러나 보도자료는 배포 전에 기업과의 의견 조정 과정이 없어 기업이 제재 내용은 물론 기밀 포함 여부에 대해서도 ‘깜깜이’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게 업계 얘기다.

공정위가 과징금과 시정조치 등 강력한 행정처분 권한을 지닌 만큼 기업의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공정위는 기업 사건 관련 보도자료 배포 시점이나 조사 내용 공개 기준에 대한 규정을 별도로 두고 있지 않다. 반면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은 경쟁 당국이 의결서를 작성하고 난 후 언론 브리핑을 한다.

공정위도 공식 의결서를 송달한 뒤 보도자료를 배포하도록 규정을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은 “공정위가 ‘의결’을 그저 형식적인 절차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며 “의결서뿐만 아니라 보도자료 배포와 관련해서도 피심인을 보호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정위는 의결서 송달이 늦어지는 것은 인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입장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올해 들어 보도자료 우선 배포 비중을 줄이고, 의결서도 빠르게 보내려고 하고 있다”면서도 “공정위 사건은 법원 판결만큼 내용이 복잡한데 한정된 인원이 처리하기 때문에 일부 지연이 발생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정소람/이슬기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