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라면 '음식물 반입 금지'가 당연하다. 그런데 지난 16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뜻밖의 음식 냄새가 풍겼다. 한달에 한번 열리는 기획 프로그램 '예술가의 런치박스' 때문. 미술 작가가 음식을 매개로 일반인들을 자신의 예술 세계로 초대하는 행사다. 참가자들이 아티스트가 준비한 점심을 먹으며 현대미술을 즐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이를 2013년부터 시행해왔다.
황문정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 사진. ©권호만 /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황문정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 사진. ©권호만 /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10월 런치박스의 주인공은 설치미술가 황문정(34). 서울대 조소학과(2012년 졸업)와 영국 글래스고 예술학교에서 레터즈 인 파인 아트 프랙티스 석사 과정(2014년 졸업)을 마쳤다. 2015년 글래스고의 갤러리 파빌리온에서 'Intervention: Bried encounters'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2018년 서울 송은아트큐브의 '무애착 도시'를 열며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황문정은 이날 자신을 지구상회 공장장으로 소개하며 참여자들을 공장에서 일하는 작업자들로 정의했다. 4개의 테이블마다 10명씩 참여자들을 앉혔고, 테이블 위에는 장난감 기차가 초밥 접시들을 얹고 달렸다. 몇 명이 밥을 빚어 접시에 올리면, 다른 작업자가 고명을 얹고 또 다른 작업자는 이를 내려서 나물로 묶어 초밥을 완성하도록 했다.
초밥 트레인, 채소 초밥을 만드는 참가자들. / 사진. ©권호만 /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초밥 트레인, 채소 초밥을 만드는 참가자들. / 사진. ©권호만 /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황문정이 설치미술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이래 꾸준히 집중해 온 주제는 '우리를 둘러싼 도시 환경'이다. 그는 도시의 질서와 체계를 구성하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비인간)의 관계에 천착하고 있다. 인간의 도시화로 인해 가려진 존재가 돼 버린 잡초, 돌멩이 등을 살피고 이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잡초나 돌멩이를 가만히 살펴보는 방식보다는 관객과 전시물의 상호작용에 주목한 방식을 전시에 접목한다. 예를 들면 전시를 게임으로 만들어 관객이 수행자로서 자연스레 참여하도록 하는 방식 등이다.

이날 예술가의 런치박스에서 사용한 식재료는 풀과 뿌리로 된 채소가 주를 이뤘다. 황문정 작가가 시멘트 사이에 자라나는 강인한 생명력의 식물에 관심을 가졌던 연장선상에서 선택된 것들이다. 참여자들은 템페(콩), 연근, 명이, 버섯 등을 부지런히 초밥 기차 위에 올려 점심을 완성했다. 작업을 하면서 그가 수차례 강조했던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속 시간이 흘러 제자리를 찾아가는 자연의 이치, 순환'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점심을 함께 먹던 한 참가자는 "협업을 하면서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뿐 아니라 사물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태도까지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흔한 식재료지만 이날 만큼은 새로운 오브제로 해석된 것. 황문정 작가는 행사를 마무리하며 "참가자들의 작업을 관찰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완성된 4종류의 채소 초밥. / 사진. ©권호만 /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완성된 4종류의 채소 초밥. / 사진. ©권호만 /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다음 달 '예술가의 런치박스'는 전보경 작가가 이끈다. 전보경은 2016년부터 수공업자의 기술과 이야기에 주목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다가오는 프로그램에서 자연을 순환하는 '물'을 주제로 내세울 계획이다. 참석자들은 작가와 함께 빙하가 지닌 소리, 빙하의 탄생과 소멸을 탐구하고 사람의 존재와 어떤 점이 닮았는지를 탐구하게 된다. 사용되는 식재료는 수제 버터라고.

서울시립미술관은 "참가자들은 취향에 따라 수제 버터를 쌓아올리고, 촉감을 통해 내재된 감각을 깨우게 된다"며 "버터의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변화를 통해 작가의 주제의식에 닿을 수 있도록 구성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행사는 11월 5일 열린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