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님과 10여 년 전 한국문학번역원 주최의 문학기행에서 만나서 인연을 이어왔어요. 이번에 수상 소식을 듣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벌떡 튀어나왔어요. 제 일처럼 너무 기뻤어요. <작별하지 않는다> 번역을 하면서 작가님께 직접 연락해 의견을 구하기도 했어요. 덕분에 섬세한 표현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박옥경 번역가)

“너무 행복했어요. 한강 작가에게도 한국 문학계에도 좋은 소식이에요. (한국 문학에 대한)세계적으로 더 좋은 인식이 퍼질 거예요. 정말 압도적이고 놀라운 뉴스예요.”(칼손 교수)

번역가 박옥경 씨와 안데르스 칼손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대(SOAS) 한국학과 교수는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와 <흰> 2권을 스웨덴어로 공동 번역해 출간했다. 두 사람은 한국-스웨덴 부부다. 박 씨는 1990년대 스웨덴 유학 중 칼손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스웨덴 스톡홀름대학교에서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칼손은 2000년부터 SOAS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7일(현지시간) 두 사람을 런던의 SOAS 연구실에서 만나서 이야기 나눴다.
스웨덴서 출판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흰> / 사진. ⓒ조민선
스웨덴서 출판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흰> / 사진. ⓒ조민선
한강 작가와 인연, 직접 소통해가며 작업

두 사람은 25년 전부터 한국 소설을 스웨덴어로 번역, 출판해왔다. 최근 한강 작가의 <흰>과 <작별하지 않는다>를, 이전에는 황석영 작가의 <한씨연대기>와 <오래된 정원>,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시인> 등을 스웨덴에 소개했다. 최근에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를 번역 중이다.

한국어로 된 소설을 스웨덴어로 옮기는 작업에 부부인 두 사람은 최적의 조합이었다. 한국어에 정통한 아내와 스웨덴인 남편은 긴밀하게 소통하며 한강 작가의 작품을 스웨덴어로 재탄생시켰다. 특히 끔찍한 절망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아름답게 표현하는 한강 작가의 문체가 어떻게 하면 스웨덴어로도 고스란히 담길지 고심, 또 고심했다.

그러고도 안 풀리는 내용은 작가에게 직접 조언을 구했다. 번역의 정확도가 올라가는 것은 물론 문학적 완결성을 끌어올리는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한 길이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는 표현이 나오거든요. 스웨덴 출판사 편집자가 통나무는 심는 게 아니라, ‘박혀있었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아니냐고 물어왔죠. 근데 번역은 작가의 의도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직접 한강 작가에게 연락해 물었는데 “‘심겨 있었다’가 맞다”는 답을 들었어요. 결국 스웨덴판에는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로, 한강 작가의 확인을 받은 표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박옥경)

<작별하지 않는다>의 타이틀도 문장 앞에 숨어있는 주어가 ‘나’인지 ‘우리’인지 한강 작가에게 직접 물어봤다. 한강 작가와 의논한 후,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로 최종 타이틀을 결정했다. 4.3사건을 다룬 이 책에는 제주 사투리가 많이 등장하는데, 작가가 제주어 리스트를 직접 보내주기도 했다.
박옥경 번역가와 안데르소 칼손 런던대 SOAS 한국학과 교수 / 사진제공. 박옥경
박옥경 번역가와 안데르소 칼손 런던대 SOAS 한국학과 교수 / 사진제공. 박옥경
해골조차 아름답게 묘사하는 작가

시적인 문체, 섬세한 감각 묘사가 특징인 한강 작가의 소설을 번역하는 일은 25년 경력의 베테랑 번역가들에게도 도전이었다.

칼손 교수는 “한강의 작품은 언어가 이야기 속으로 나를 초대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언어는 아무리 어려운 주제도 읽을 수 있도록 만든다”며 “한강의 언어가 어려운 내용을 설명해 내기 때문에, 우리도 그 정도로 (문학적으로) 수준이 높은 스웨덴어 단어를 찾아내야 했다”고 설명했다.

스웨덴 한 언론은 리뷰에서 “한강은 해골조차 아름답게 묘사하는 작가”라고 썼다. 한강 특유의 섬세한 표현이 담길 수 있도록 최적의 스웨덴어를 찾는 작업은 힘겨웠지만 가치 있었다. 박 씨는 “그의 묘사는 날실과 씨실의 감정선이 촘촘하게 짜여있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노벨상은 작가의 작품과 평가가 쌓여서 받은 상

그동안 한국인에게 노벨문학상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으로 인식됐다. 한국어라는 소수 언어의 한계를 넘어, 과연 원문의 매력 그대로 세계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늘 번역의 한계가 거론됐다. 한강이 노벨상을 수상한 건 그래서 번역가들이 함께 만든 결과다.

“노벨상은 한 작품에 주는 상이 아니거든요.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보고 주는 상입니다. 이 상은 영어는 물론 스웨덴,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등 다른 언어로도 작품이 알려지면서 받은 좋은 평가가 쌓여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요.”(박옥경)
한강의 노벨상 수상 직후 스웨덴 출판사 Natur och Kultur 관계자들이 모여 축하하는 모습 / 사진제공. 박옥경
한강의 노벨상 수상 직후 스웨덴 출판사 Natur och Kultur 관계자들이 모여 축하하는 모습 / 사진제공. 박옥경
칼손 교수는 “데보라 스미스의 영어판이 출판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강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느꼈다. 영어판 출판은 국제적인 무대에서의 성공 계기(international breakthrough)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쌓여서 한 단계씩 확장되는 것을 보여준 결과”라는 해석이다. 이어 “한 작품의 결과가 아니라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흰>,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쌓여서 노벨상 수상의 결정타(tipping point)가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20여 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출판사와 번역가의 협업으로 한국 문학의 인지도가 차곡차곡 쌓여왔다. 한강 작가만 해도 영문판은 물론, 스웨덴,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25개 언어로 번역본이 출간됐다.

스웨덴에서 대중적 인기 + 직역본의 힘

물론 노벨상 수상에 스웨덴어 번역본의 영향도 적지 않다.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에서 결정한다. 1786년 설립된 한림원은 스웨덴어의 보존과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학술기구로 위원 전원이 스웨덴인이다. 노벨상 심사 과정에는 당연히 스웨덴어 번역본이 있으면 유리하다.

노벨위원회는 한림원 위원 18명 중 5명을 노벨분과위원으로 지명한다. 분과위는 후보자들의 모든 책을 다 읽고 조사하며, 나머지 한림원 위원 13명도 모든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눈다. 이후 위원 전원이 참여해 수상자를 선정한다.

칼손 교수는 "만약 최종 심사 단계에서 스웨덴어로 된 책이 있다면 스웨덴판부터 읽고, 없다면 영어판, 불어, 독일어판 등을 읽는 식으로 심사 절차가 진행된다”며 “이 과정에서 스웨덴어로 나온 책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스웨덴판 직역본이 노벨상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 부부는 <흰>과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글판을 스웨덴어로 직역했다.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는 영어판을 중역한 버전이다. 단어 하나 선택으로 글맛이 달라지는 게 문학인 만큼, 스웨덴은 물론 전 세계 출판계 어디서나 직역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원작을 기반으로 곧바로 번역하는 것이 베스트죠. 스웨덴 출판사들도 원전 번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역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강해요. 언론의 리뷰도 중역과 원전을 직접 번역한 것의 차이를 매우 중요하게 꼬집는 편이고, 출판사들도 원전 번역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입니다.” (칼손)

<작별하지 않는다> 직역본 출간 이후 스웨덴의 10개 이상의 일간지와 문학잡지에서 호평이 쏟아졌다.
스웨덴 평론가 잉리드 엘람은 지난 3월 스웨덴 일간 다겐스 뉘헤테르(DN)에 쓴 글에서 “안데르스 칼손과 박옥경의 번역에서 한강의 산문은 눈의 결정처럼 섬세하고 가볍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일간 웁살라 뉘아 티드닝(Uppsala Nya Tidning)에서는 “한강의 작품세계는 완전히 다른 레벨(수준)이다”라고 타이틀을 뽑았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서평 이미지 캡처본, 웁살라 뉘아 티드닝은 지난 3월
<작별하지 않는다>의 서평 이미지 캡처본, 웁살라 뉘아 티드닝은 지난 3월 "한강의 작품세계는 완전히 다른 레벨이다"라고 썼다.
스웨덴에서의 대중적 인기도 한몫

“한강 작가는 스웨덴에서 대중적으로 인기 있어요. 스웨덴 한림원이 가끔 잘 모르는 작가들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한다는 비판도 있었는데, 드디어 많은 스웨덴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를 선정한 것 같아요.”(칼손)

국내에선 그동안 스웨덴 출판계의 분위기를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한강의 대중적인 인기는 이미 높았다. 올해 3월 <작별하지 않는다> 북토크에선 1000명이 넘는 독자들이 한강 작가의 사인회를 찾았고, 작년 9월 스웨덴 왕립극장에서 연극 <채식주의자>가 상연되기도 했다. 지난 3월 스웨덴 라디오 방송은 한강을 소개하며 “노벨상 후보로 자주 언급되는 한강 작가가 곧 스웨덴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썼다.

“돌아보면 한강 작가를 향한 스웨덴 내 평가는 이미 노벨상을 받을 만했던 것 같아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해야 할까요?” (박옥경)

노벨문학상 발표 직후, 스웨덴 언론에선 한강의 수상 소식을 크게 다뤘다. 노벨상의 나라 스웨덴에서도 유독 문학상은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 편이다. 인지도 높은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은 SNS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는 것. 한강의 소설을 펴낸 스웨덴 출판사 나뛰르 오크 쿨튀르(Natur och Kultur) 관계자들은 “아, 드디어!”라는 감탄사를 쏟아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 직후 스웨덴 출판사 Natur och Kultur 관계자들이 모여 축하하는 모습 / 사진제공. 박옥경
한강의 노벨상 수상 직후 스웨덴 출판사 Natur och Kultur 관계자들이 모여 축하하는 모습 / 사진제공. 박옥경
노벨상 수상 이후, 한강의 인기는 더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출판사는 즉시 7만 부를 추가로 찍어냈다. 스웨덴 배우의 음성을 입힌 <작별하지 않는다>와 <채식주의자> 오디오북이 2주 후에 공개된다.

스웨덴서 중역본으로만 출판된 <채식주의자>는 직역본 출판 가능성이 높다. 나뛰르 오크 쿨튀르의 니나 에이뎀 출판책임자는 “ 장기적으로는 <채식주의자>의 중역본을 직역본으로 재번역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직역본의 매력이 어떻게 다르게 표현될지 궁금하다고 밝혔다.

술술 읽혀도 소화하기 어려워- 2030에 소구하는 모던한 소설

Easy to read, but difficult to digest.

노벨상 발표 이후에 스웨덴 한 방송에서도 한강 작품에 대한 분석이 쏟아졌다. 한 한림원 위원은 “한강 작품은 흡입력이 강해서 쉽게 읽힌다. 일단 시작하면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칼손 교수도 “줄줄 읽는데 그걸 소화하고 이해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 여운이 몇 달이 지나도 남는다는 평가가 많다”고 강조했다.

먼 한국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한강 작가는 스웨덴 내에선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한국인 작가로 인식된다.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한강의 책을 읽는 게 아주 흥미로운 점이에요.”(칼손)

“굉장히 탈근대적이고, 모던하다는 평이 많아요. 역사를 다루는 방식이 현대적이고, 낡지 않은 느낌이 있다고들 해요. 기존에 보지 못한 새로운 소설이라 매력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박옥경)

그리고 세계 문학계에서는 이미 한강의 노벨상 수상 이전부터 한국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왔다. 최근에는 어떤 작품을 번역해 출판하면 좋을지 문의가 쏟아진다는 게 이들의 전언이다. 한강의 노벨상 이후 한국 문학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
스웨덴에서 출판된 한국 작가들의 번역본과 스웨덴 최고의 문학잡지에 실린 한국 특별호 / 사진. ⓒ조민선
스웨덴에서 출판된 한국 작가들의 번역본과 스웨덴 최고의 문학잡지에 실린 한국 특별호 / 사진. ⓒ조민선
25년 차 번역가 부부는 이렇게 덧붙였다. “노벨상 수상 전부터 분위기는 무르익었어요. 한강을 비롯해 김영하, 천명관, 김애란, 배수아 등 젊은 한국 작가에 대한 관심은 이미 10년 전부터 시작됐고요. 이번 수상으로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은 더 높아질 거라고 봐요. 지난 25년간 스웨덴에 한국 문학이 서서히 스며들었던 것처럼, 전 세계에 좋은 작품이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런던=조민선 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