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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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분쟁 격화에도…원유 가격은 왜 떨어질까 [양병훈의 해외주식 꿀팁]
이스라엘과 반(反)이스라엘 연대 간의 분쟁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최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의 최고 지도자 야히아 신와르를 제거했고, 이란은 이에 대해 “저항정신이 거세질 것”이라며 강경 대응 의지를 내보였습니다. 이란은 하마스, 헤즈볼라 등 반미국·이스라엘 연대의 핵심입니다.

중동에서 분쟁이 확산하면 원유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이에 따라 원유 선물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세계은행은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대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전망을 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후 1년 동안 중동 분쟁은 점점 더 격화됐지만, 원유 가격은 오히려 떨어졌거든요.


데이터를 자세히 볼까요.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의 최근월물 가격은 지난해 10월 종가 평균이 85.29달러였습니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사실이 알려진 뒤 첫 거래일인 2023년 10월 9일에는 하루 만에 가격이 4.34% 급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상승세는 금방 힘을 잃었습니다. WTI 유가는 당월 19일 88.37달러를 고점으로 지금까지 줄곧 우하향했습니다. 이달 1~18일 평균 가격은 72.64달러에 그쳤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가가 오를 것이라는 말을 믿고 투자했던 국내 개인 투자자들은 잔뜩 물려 있는 상황입니다. 네이버증권에 따르면 원유 선물 가격을 추종하는 국내 파생상품 중 가장 시가총액이 큰 '삼성 레버리지 WTI원유 선물 상장지수증권(ETN)' 투자자들의 이 종목 수익률은 21일(한국시간) 현재 약 -32%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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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가가 맥을 못 추는 건 중국의 경기 부진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닛케이아시아는 이날 보도에서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로 최악의 경우 원유 가격이 1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할 수 있다"면서도 "지정학적 충돌이 없다면 중국과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경제성장률이 둔화하면서 내년까지 원유 가격 하락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관측했습니다. 에릭 놀랜드 CME그룹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원유 가격은 지난 20년 동안 약 1년의 시차를 두고 중국 경제성장률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놀랜드 이코노미스트의 말대로 중국 경제 성장률과 WTI 유가의 흐름은 어느 정도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중국 경제성장률은 2007년 14.19%로 정점을 찍었고, 그 이듬해 7월 WTI 유가는 배럴당 145.29달러까지 올랐습니다. 2000년대 최고가였습니다. 2008년 중국 경제성장률이 9.62%로 떨어지자 WTI 유가는 2009년 3월 40달러대까지 떨어졌습니다. 2015~2019년 중국 경제 성장률이 6%대를 유지하자 WTI 유가도 50달러 인근에서 머물렀습니다. 중국 경제성장률이 2021년 8.4%로 반등했을 때는 WTI 가격도 잠깐 100달러 위로 올라왔고요.

그렇다면 앞으로의 유가 흐름은 어떨까요? 단기적으로는 중동 분쟁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분쟁이 격화돼 이란의 원유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순식간에 가격이 튀어 오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계속 우하향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중국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5.2%에서 2026년 4%대 중반까지 지속해서 내려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내연기관차가 점점 전기자동차로 교체되고 있는 것도 유가 하락 전망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블룸버그는 지난 8월 "중국 내 전기차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자동차(전기와 휘발유 모두를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는 차) 판매량이 지난달 처음으로 전체 자동차 판매량의 50%를 돌파했다"며 "전기차 산업은 글로벌 수요 둔화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여전히 강력한 모멘텀을 보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슬람식 베일을 쓴 여자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위 왼쪽)와 전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위 오른쪽)가 그려진 벽화 앞을 지나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슬람식 베일을 쓴 여자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위 왼쪽)와 전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위 오른쪽)가 그려진 벽화 앞을 지나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스라엘과 이란이 유가를 폭등시킬 정도로 분쟁을 키울 가능성은 작다는 관측도 나옵니다. 이스라엘 분쟁 확대를 꺼리는 미국의 우방국이고, 이란도 지금까지 미국이 설정한 '레드라인'은 넘지 않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미국이 2020년 1월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암살했을 때 이란이 했던 '보복'이 그 사례입니다. 이란은 미국에 사전 통보를 한 뒤 미국 공군기지의 공터로 미사일을 쏘는 정도로 일을 마무리했습니다. 국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뭐라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정말로 공격했다가는 큰일 날 테니 이 정도만 한 거죠.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