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에게 폴 고갱은 질투와 모방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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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동훈의 고흐로 읽는 심리수업
고흐의 모방 욕망
고갱을 트집잡던 고흐, 모방 전염으로 고갱을 영웅시 하게 되다
고흐의 모방 욕망
고갱을 트집잡던 고흐, 모방 전염으로 고갱을 영웅시 하게 되다
폴 고갱의 '마담 지누의 초상 스케치'(1888)와 반 고흐의 '아를의 여인'(1888)은 카페 드라갸흐(Cafe de la Gare)의 여주인이었던 마리 지누(Marie Ginoux)가 주인공이다. 같은 시간에 이 여인을 보고 고흐는 스케치로, 고갱은 유화로 남겼다. 이후 고갱은 이 스케치를 토대로 새로운 요소들을 추가하여 '밤의 카페'(1888)라는 작품을 그렸고, 고흐도 경쟁적으로 양산 대신 두 권의 책을 추가하여 또 한 점의 '아를의 여인'(1888)을 그렸다. 고흐가 생레미 요양원에서 그린 세 번째 '아를의 여인'(1890)은 색채만 다를 뿐 고갱의 스케치를 베낀 듯 똑같다.
모방 욕망
고흐가 고갱의 그림을 경쟁적으로 모방한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어떤 대상을 향하여 경쟁하면서도 닮아가는 상태를 ‘모방 욕망’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모방 욕망이 본인 스스로보다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생긴다고 보았다.
고흐가 현실 속 사물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면, 고갱은 상상을 통해 작업했다. 고흐는 이런 고갱의 방식을 트집 잡았다. 상상 속 작업은 사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며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시에서부터 파리 전위 미술에 이르는 상징주의까지 헐뜯었다. 특히 그 사상이 사실주의(realism)에서 등을 돌렸다는 점을 꼬집었다. 이에 대해 고갱은 성서에 나오는 마법과 같은 기적의 내용을 예로 들면서 상징성을 옹호했다. 그러자 고흐는 상징과 상상의 장점마저 빈정댔다.
분명 이때까지만 해도 고흐는 고갱을 향한 모방 욕망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고흐와 아주 가까운 친구였던 에밀 베르나르가 상징주의적 성향을 보이면서 고갱에게 절대적 존경심을 표했다. 파리 미술계의 새로운 관심도 그에게 쏠리고 있었다.
표현 방식의 문제로 한동안 서먹했던 고갱으로부터 오랜 침묵을 깨고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다음의 문장이 고흐의 눈에 들어왔다. “매일 점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네. 그래서 출발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그를 믿고 기다렸던 고흐는 시도 때도 없이 드러내는 고갱의 궁색한 티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고갱에게 올 건지 안 올 건지 직설적으로 물어봐.” 만약 고갱이 계속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이사를 늦추면 그와의 관계를 끊고 지원하겠다는 제안도 즉시 철회하라고 서슬을 돋구었다. 그런데 테오는 뜻밖의 답장을 보냈다. 테오는 오히려 고갱을 두둔하면서, 노란 집 내부 수리에만 집중하느라 그림 판매에는 신경 쓰지 않는 고흐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고갱을 비난하려거든 오히려 고갱과 함께하려던 화가 공동체를 집어치우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라고까지 했다. 동생 테오도 고갱을 대단한 화가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관련 칼럼] 부모와 애착이 부족했던 고흐에겐 '노란 안전기지'가 있었다 반면 자신이 꿈꿨던 화가 공동체가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고흐는 신경쇠약 증세까지 겪었다. 5월에 노란 집에 세를 들고 내부 수리를 마치는 9월 중순까지 그가 묶었던 카페 드라갸흐에 있던 누구도 자신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이제 나이 먹고 몸도 성하지 못할 것 같은 걱정이 앞섰다. 심지어 에밀 졸라의 소설 <걸작>에서 자살한 화가 주인공 랑티에가 떠올랐다. 이때 심한 자책으로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했다. 혼자 쓸쓸하게 있을 때마다, 그리고 전시회 출품작을 독촉하는 테오에게 약속을 어겨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솔직히 고갱의 인기와 성공이 부러웠다.
모방 전염
이제 화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고갱과 잘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테오와 베르나르를 비롯해 파리의 미술계로부터 호평을 받는 그 고갱의 방식을 작업에 적용하면 자신도 출세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주변 사람들이 모방 욕망을 갖게 되면 전혀 그런 생각이 없던 사람들도 모방하려고 들기 쉽다. 예를 들어 특별한 관심이 없던 어떤 연예인이나 공적 인물에 대해 많은 사람이 환호하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자신도 덩달아 그들을 좋아하게 된다. 르네 지라르는 이것을 ‘모방 전염’이라고 했다. 고갱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고흐에게도 일종의 모방 전염이 일어난 셈이다. 그리하여 고흐는 편지에서 테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제 그렇게 위대한 화가에 대하여 우울하거나 질 낮거나 악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구나.”
고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과 고갱은 예술 동지라 자랑했으며 14세기 이탈리아를 들먹이며 자신을 시인 보카치오로, 고갱을 존경받는 은둔자 페트라르카로 영웅시했다. 그들의 ‘사랑을 초월한 우정’을 통해 중세의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시대를 열었듯이 자신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고흐는 점차 고갱을 자신의 예술적 동반자로까지 생각하게 되었으며 예술을 자신들의 자식이라 말했다. 반드시 고갱과 함께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겠노라 했으며, 자신은 아내와 가족을 만드는 일뿐 아니라 여인과 몸을 섞는 일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로지 고갱과 함께 예술에 온 정성을 바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 꿈에 부풀어 고갱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고흐는 혼잡한 거리의 풍경을 그리며, 해가 뜰 때부터 가스등이 켜질 때까지 열정적으로 작업했다. 그러면서 그토록 비판했던 고갱의 방식을 모방해 성서 일화에 대한 일부 작품을 상상을 동원해 그렸다. 이때부터 고흐는 고갱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1888년 10월 23일 목을 빼고 기다리던 고갱이 노란 집에 도착했다. 고흐는 병으로 쇠약하다는 고갱의 편지 덕에 내심 그의 파리한 모습을 걱정했었다. 하지만 고갱은 마치 씨름꾼처럼 건장한 체격에 싸움닭 같은 퉁명스러운 눈초리로 고흐를 쳐다보았다. 그때의 놀람이 다음의 편지에 잘 드러난다. “고갱은 아주 건강한 상태로 도착했다. 나보다도 훨씬 더 좋아 보이는구나. 나는 지금 야만적 본능을 지닌 자연 그대로의 생물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몇 주 후에 날아온 테오의 답장은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았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아주 기쁨에 차 있었다. 고갱의 작품 '브르타뉴의 소녀들'이 상당한 가격에 팔렸다는 것이다. 테오는 500프랑이라는 거금을 동봉했고, 고갱과는 작품 수수료를 인상한다는 서신이 오고 갔다. 고흐는 이렇게 큰돈을 받아본 것이 난생처음이라 한편으론 기뻤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글픔이 일었다. 평생에 고갱의 작품처럼 높은 가격에 자신의 작품이 팔릴 자신이 없었다.
이미 알고 지냈던 넉 달 동안 고흐에게 무관심했던 카페 드라갸흐의 안주인 마리 지누가 고갱에게 관심을 보였다. 고갱이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녀는 노란 집에서 고갱을 마주하고 앉았다. ‘폴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호감을 사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고흐가 근처에서 자신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고흐는 허락되지 않은 시선을 힐긋거리며 그녀를 그렸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지누 부인이 나갔지만, 고흐는 단숨에 유화를 완성했고 고갱은 목탄으로 스케치만 간신히 마쳤다. 이윽고 고갱은 목에 힘을 주더니 상징주의 화가는 중요 부분만 스케치하고 나중에 상징적 요소를 추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려 들었다. 두 주 후에 앞서 언급했던 '밤의 카페'가 탄생했다. 고흐도 고갱의 방식을 따라 상징적 요소를 추가하여 또 한 점의 '아를의 여인'을 그렸다. 여인의 양산 대신 두 권의 책을 추가했다. 2년 후 생레미 요양원에 있을 때는 고갱이 스케치한 마리 지누를 꼭 그대로 닮은 또 한 점의 '아를의 여인'을 남겼다. 고흐는 왜 이렇게까지 고갱의 방식을 따라 한 것일까? 고흐만의 스타일
사실 고갱은 '밤의 카페'를 통해 고흐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림에는 마담 지누 앞에 압생트, 탄산수, 각설탕이 있다. 또한 후경에는 술꾼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 두 사람은 고흐의 친구들로 고흐가 직접 그려서 노란 집에 걸어두었던 화가 밀리에와 우체부 룰랭이다. 고갱은 그들의 초상화를 보고 후경에 그들을 그려 넣었다. 밀리에는 탁자에 엎어져 곯아떨어진 사람 옆에 있으며, 룰랭은 세 사람과 함께 떠들고 있다. 또한 고갱은 당구대 아래에 음탕함을 상징하는 작은 고양이를 그려 넣었다. 고흐는 이 그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외로운 고흐가 그나마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과 이 지역을 모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고갱은 대놓고 이 카페를 비롯하여 아를과 노란 집에 대하여 “남부에서 가장 추잡한 곳”이라고 했다. 고흐는 치욕스러운 당시 상황을 테오에게 이렇게 전했다.
고흐가 보기에 아를은 자연을 자연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그래서 거의 매일 그림 도구를 챙겨 자연으로 나갔었다.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자신의 방법이 그 자연에 있었기에 너무 좋았다. 그런데 고갱에게 아를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제 고갱이 노란 집 식구가 되자 고흐는 바깥과 분리된 채 고갱이 사용하는 황마로 된 캔버스에 상징적 요소들로만 그림을 장식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지역에서 고갱은 더 많은 인기를 누렸고 고흐는 더욱더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다. 차라리 고흐가 자신이 보았던 그대로 캔버스에 담으려고 했다면 아마도 두 사람의 기법 모두를 포함한 예술가 공동체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심지어 집단 속에 있다고 해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나의 가치를 스스로 아는 것이다. 만약 주변 사람들이 우리의 동료를 영웅으로 본다면 우리도 고흐처럼 행동할지 모르겠다. 그에게 고갱에 대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기와 명예를 갈망하면 할수록 자신만의 가치를 찾기 어렵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은 주목받지 않아도 내적으로 강인하다. 이런 강인함이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도록 돕는다. 이제 자신만의 스타일을 믿으며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인기가 아닌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김동훈 인문학연구소 ‘퓨라파케’ 대표
고흐가 고갱의 그림을 경쟁적으로 모방한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어떤 대상을 향하여 경쟁하면서도 닮아가는 상태를 ‘모방 욕망’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모방 욕망이 본인 스스로보다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생긴다고 보았다.
고흐가 현실 속 사물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면, 고갱은 상상을 통해 작업했다. 고흐는 이런 고갱의 방식을 트집 잡았다. 상상 속 작업은 사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며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시에서부터 파리 전위 미술에 이르는 상징주의까지 헐뜯었다. 특히 그 사상이 사실주의(realism)에서 등을 돌렸다는 점을 꼬집었다. 이에 대해 고갱은 성서에 나오는 마법과 같은 기적의 내용을 예로 들면서 상징성을 옹호했다. 그러자 고흐는 상징과 상상의 장점마저 빈정댔다.
분명 이때까지만 해도 고흐는 고갱을 향한 모방 욕망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고흐와 아주 가까운 친구였던 에밀 베르나르가 상징주의적 성향을 보이면서 고갱에게 절대적 존경심을 표했다. 파리 미술계의 새로운 관심도 그에게 쏠리고 있었다.
표현 방식의 문제로 한동안 서먹했던 고갱으로부터 오랜 침묵을 깨고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다음의 문장이 고흐의 눈에 들어왔다. “매일 점점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네. 그래서 출발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그를 믿고 기다렸던 고흐는 시도 때도 없이 드러내는 고갱의 궁색한 티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테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고갱에게 올 건지 안 올 건지 직설적으로 물어봐.” 만약 고갱이 계속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이사를 늦추면 그와의 관계를 끊고 지원하겠다는 제안도 즉시 철회하라고 서슬을 돋구었다. 그런데 테오는 뜻밖의 답장을 보냈다. 테오는 오히려 고갱을 두둔하면서, 노란 집 내부 수리에만 집중하느라 그림 판매에는 신경 쓰지 않는 고흐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고갱을 비난하려거든 오히려 고갱과 함께하려던 화가 공동체를 집어치우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라고까지 했다. 동생 테오도 고갱을 대단한 화가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관련 칼럼] 부모와 애착이 부족했던 고흐에겐 '노란 안전기지'가 있었다 반면 자신이 꿈꿨던 화가 공동체가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고흐는 신경쇠약 증세까지 겪었다. 5월에 노란 집에 세를 들고 내부 수리를 마치는 9월 중순까지 그가 묶었던 카페 드라갸흐에 있던 누구도 자신에게 곁을 주지 않았다. 이제 나이 먹고 몸도 성하지 못할 것 같은 걱정이 앞섰다. 심지어 에밀 졸라의 소설 <걸작>에서 자살한 화가 주인공 랑티에가 떠올랐다. 이때 심한 자책으로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했다. 혼자 쓸쓸하게 있을 때마다, 그리고 전시회 출품작을 독촉하는 테오에게 약속을 어겨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솔직히 고갱의 인기와 성공이 부러웠다.
모방 전염
이제 화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의 현재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고갱과 잘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테오와 베르나르를 비롯해 파리의 미술계로부터 호평을 받는 그 고갱의 방식을 작업에 적용하면 자신도 출세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주변 사람들이 모방 욕망을 갖게 되면 전혀 그런 생각이 없던 사람들도 모방하려고 들기 쉽다. 예를 들어 특별한 관심이 없던 어떤 연예인이나 공적 인물에 대해 많은 사람이 환호하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자신도 덩달아 그들을 좋아하게 된다. 르네 지라르는 이것을 ‘모방 전염’이라고 했다. 고갱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고흐에게도 일종의 모방 전염이 일어난 셈이다. 그리하여 고흐는 편지에서 테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제 그렇게 위대한 화가에 대하여 우울하거나 질 낮거나 악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구나.”
고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과 고갱은 예술 동지라 자랑했으며 14세기 이탈리아를 들먹이며 자신을 시인 보카치오로, 고갱을 존경받는 은둔자 페트라르카로 영웅시했다. 그들의 ‘사랑을 초월한 우정’을 통해 중세의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시대를 열었듯이 자신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고흐는 점차 고갱을 자신의 예술적 동반자로까지 생각하게 되었으며 예술을 자신들의 자식이라 말했다. 반드시 고갱과 함께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겠노라 했으며, 자신은 아내와 가족을 만드는 일뿐 아니라 여인과 몸을 섞는 일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로지 고갱과 함께 예술에 온 정성을 바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 꿈에 부풀어 고갱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고흐는 혼잡한 거리의 풍경을 그리며, 해가 뜰 때부터 가스등이 켜질 때까지 열정적으로 작업했다. 그러면서 그토록 비판했던 고갱의 방식을 모방해 성서 일화에 대한 일부 작품을 상상을 동원해 그렸다. 이때부터 고흐는 고갱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했다.
1888년 10월 23일 목을 빼고 기다리던 고갱이 노란 집에 도착했다. 고흐는 병으로 쇠약하다는 고갱의 편지 덕에 내심 그의 파리한 모습을 걱정했었다. 하지만 고갱은 마치 씨름꾼처럼 건장한 체격에 싸움닭 같은 퉁명스러운 눈초리로 고흐를 쳐다보았다. 그때의 놀람이 다음의 편지에 잘 드러난다. “고갱은 아주 건강한 상태로 도착했다. 나보다도 훨씬 더 좋아 보이는구나. 나는 지금 야만적 본능을 지닌 자연 그대로의 생물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몇 주 후에 날아온 테오의 답장은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았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아주 기쁨에 차 있었다. 고갱의 작품 '브르타뉴의 소녀들'이 상당한 가격에 팔렸다는 것이다. 테오는 500프랑이라는 거금을 동봉했고, 고갱과는 작품 수수료를 인상한다는 서신이 오고 갔다. 고흐는 이렇게 큰돈을 받아본 것이 난생처음이라 한편으론 기뻤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글픔이 일었다. 평생에 고갱의 작품처럼 높은 가격에 자신의 작품이 팔릴 자신이 없었다.
이미 알고 지냈던 넉 달 동안 고흐에게 무관심했던 카페 드라갸흐의 안주인 마리 지누가 고갱에게 관심을 보였다. 고갱이 온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녀는 노란 집에서 고갱을 마주하고 앉았다. ‘폴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호감을 사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고흐가 근처에서 자신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고흐는 허락되지 않은 시선을 힐긋거리며 그녀를 그렸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지누 부인이 나갔지만, 고흐는 단숨에 유화를 완성했고 고갱은 목탄으로 스케치만 간신히 마쳤다. 이윽고 고갱은 목에 힘을 주더니 상징주의 화가는 중요 부분만 스케치하고 나중에 상징적 요소를 추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려 들었다. 두 주 후에 앞서 언급했던 '밤의 카페'가 탄생했다. 고흐도 고갱의 방식을 따라 상징적 요소를 추가하여 또 한 점의 '아를의 여인'을 그렸다. 여인의 양산 대신 두 권의 책을 추가했다. 2년 후 생레미 요양원에 있을 때는 고갱이 스케치한 마리 지누를 꼭 그대로 닮은 또 한 점의 '아를의 여인'을 남겼다. 고흐는 왜 이렇게까지 고갱의 방식을 따라 한 것일까? 고흐만의 스타일
사실 고갱은 '밤의 카페'를 통해 고흐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림에는 마담 지누 앞에 압생트, 탄산수, 각설탕이 있다. 또한 후경에는 술꾼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 두 사람은 고흐의 친구들로 고흐가 직접 그려서 노란 집에 걸어두었던 화가 밀리에와 우체부 룰랭이다. 고갱은 그들의 초상화를 보고 후경에 그들을 그려 넣었다. 밀리에는 탁자에 엎어져 곯아떨어진 사람 옆에 있으며, 룰랭은 세 사람과 함께 떠들고 있다. 또한 고갱은 당구대 아래에 음탕함을 상징하는 작은 고양이를 그려 넣었다. 고흐는 이 그림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외로운 고흐가 그나마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과 이 지역을 모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고갱은 대놓고 이 카페를 비롯하여 아를과 노란 집에 대하여 “남부에서 가장 추잡한 곳”이라고 했다. 고흐는 치욕스러운 당시 상황을 테오에게 이렇게 전했다.
“그는 나한테 자신이 살던 곳 브르타뉴를 얘기해. 그곳의 모든 것이 여기보다 얼마나 더 훌륭하고 크며 아름다운지 말이다. 특히 그곳은 좀 더 엄숙하고 색조가 한결 순수하다고 해. 이곳 프로방스의 경치는 노랗게 우글쭈글 시들어 시시하다는구나.”
고흐가 보기에 아를은 자연을 자연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그래서 거의 매일 그림 도구를 챙겨 자연으로 나갔었다.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자신의 방법이 그 자연에 있었기에 너무 좋았다. 그런데 고갱에게 아를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이제 고갱이 노란 집 식구가 되자 고흐는 바깥과 분리된 채 고갱이 사용하는 황마로 된 캔버스에 상징적 요소들로만 그림을 장식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지역에서 고갱은 더 많은 인기를 누렸고 고흐는 더욱더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다. 차라리 고흐가 자신이 보았던 그대로 캔버스에 담으려고 했다면 아마도 두 사람의 기법 모두를 포함한 예술가 공동체가 되었을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심지어 집단 속에 있다고 해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나의 가치를 스스로 아는 것이다. 만약 주변 사람들이 우리의 동료를 영웅으로 본다면 우리도 고흐처럼 행동할지 모르겠다. 그에게 고갱에 대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기와 명예를 갈망하면 할수록 자신만의 가치를 찾기 어렵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사람은 주목받지 않아도 내적으로 강인하다. 이런 강인함이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도록 돕는다. 이제 자신만의 스타일을 믿으며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타인의 인기가 아닌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김동훈 인문학연구소 ‘퓨라파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