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국가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면
565억원의 교육예산을 선거 비용으로 쓴 지난 서울교육감 보궐선거에서 ‘민주진보 단일후보’로 나서 당선된 정근식 교육감의 선거 구호는 ‘뉴라이트, 친일교육 심판’이었다. 독립문 앞에서 출정식을 열었고 역사공약 1호도 ‘역사 자료센터 설립’이다. 11조원이 넘는 예산을 쓰면서도 진보교육감 10년이 남긴 학생인권조례 논란, 교육 격차 확대와 문해력 저하, 교권 추락과 공교육 붕괴에 대한 책임과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인공지능(AI)과 로봇의 시대에 가치 창출의 원천이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의미를 창출하는 능력’으로 옮겨가고 있다. 대학 졸업장은 ‘등록금 완납 영수증’이 된 지 오래고, 낡은 수능 제도에 발목 잡힌 사교육 광풍은 멈출 줄 모른다. 무엇을 위한 교육감 직선제 18년이었는지 모르겠다.

정치에 절망하고 선출된 권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전 세계적 현상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특별하다. 북한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하며 안보 상황이 급변하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개혁 과제가 산적해 있다, 하지만 국내 정치 리더십은 무기력을 넘어 실종 상태다. 무리하게 강행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은 정권의 블랙홀이 돼 진퇴양난의 늪에 빠졌다. 최대 국정 현안으로 떠오른 영부인 문제로 정쟁은 그칠 줄 모르고, 국회 제1당은 정부 마비를 노린 ‘탄핵의 상설화’로 헌정질서의 근본을 위협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해 존재해야 할 정치가 오히려 문제 해결을 막는 최대 걸림돌이 됐다. 분열적 이슈들을 계속 끌어가야 당파적 이익에 유리하다는 마약에 중독된 정치권은 치유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의 밑바닥에 공동체화에 빠진 기능조직의 문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가족이나 취미 모임 같은 공동체(Gemeinschaft)와 달리 국가기관이나 기업, 정당 같은 기능체(Gesellschaft)는 만들어진 고유의 목적이 존재한다. 기능체의 공동체화가 심화되면 조직의 본래 목적을 망각하고 권력과 조직을 사유화하는 폐단이 발생한다. 공공연히 정보의 내부 은닉이 벌어지고 불리하게 작용할 자신들의 문제를 결코 외부에 노출하지 않는다. 정당한 내부경쟁과 인사의 능력주의는 부정되고 신상필벌은 작동하지 않는다. 가장 위험한 것은 조직의 주관이 일반의 상식과 크게 달라지는 윤리적 일탈이다. 사회에서 비난받는 행동조차도 조직 내에서는 ‘정의’라는 명분을 갖는다. ‘조직을 위해서’라는 잘못된 윤리에 따라 수단의 옳고 그름은 무시되고 오직 조직을 위한 충성심만이 강요된다.

공동체화의 최후는 ‘멸망의 미학’이다. 과거의 성공 신화에 도취해 전 국민을 태평양전쟁의 수렁으로 몰아넣으며 폭주했던 군국주의 시대 일본 육·해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다모클레스의 칼은 권력과 성공에 따르는 부작용을 상징한다. 위험은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고요하면서도 냉혹하게 다가온다. 토드 부크홀츠는 “국가가 번영의 시절을 끝내고 불황의 시대로 접어들 때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경향이 있고, 국가 기강이 해이해질 때 모든 곳에서 기회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고 지적한다. 국가는 공동체의 단일한 원천이다. 국민이 통제하지 않으면 국회를 포함해 그 어떤 정부도 계속 좋은 일을 할 수 없다.

변화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에드먼드 버크는 “악인들이 연합할 때 선한 사람들도 제휴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선한 사람들이 차례로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새로운 세상을 상상해내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저 단순하게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고 과거만을 답습하는 곳에 ‘희망의 그릇’은 필요 없는 사치품일 뿐이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 반드시 불가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냉소주의는 반드시 피해야 할 치명적인 위협이다. 좌절의 순간이 밀려올 때마다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기억하자. “어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고 말한다. ‘왜 그럴까’라고. 그러나 나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꿈꾸며 말한다. ‘왜 안 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