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수트를 입고 휠체어에 앉은 이정재, 2005년 백남준의 시선으로 뉴욕 거리를 바라보다
구찌 수트를 입은 이정재가 구석에 놓인 휠체어를 끌고 와 앉는다. 그러자 '광고 사진의 대부' 김용호 사진작가가 휠체어를 밀어준다. 두 사람은 벽에 걸린 몇 장의 사진들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사진들을 일어서서 보려면 허리를 한껏 굽혀야 한다. 사람의 허리춤에 올 만큼 벽에 낮게 걸어두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사진작가 김용호가 2005년 뉴욕에서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을 만나 시간을 보내며 촬영한 사진들이다. '백남준 휠체어 레벨 아이'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온 작품은 휠체어를 타고 세상을 바라보던 백남준의 시선으로 뉴욕의 거리를 기록했다. 사진을 보는 관객도 백남준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람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작품을 모두 낮게 설치했다. 관객은 구석에 놓인 휠체어를 끌어와 직접 타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가 밀어주기도 하며 백남준이 되어 본다.
구찌 수트를 입고 휠체어에 앉은 이정재, 2005년 백남준의 시선으로 뉴욕 거리를 바라보다
김용호는 타인의 시선과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진작가다. 그가 백남준의 기록과 함께 한국 문화를 빛낸 거장 4인을 자신의 시선으로 풀어낸 사진전이 열렸다.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구찌가 기획한 '구찌 문화의 달'을 맞이한 대형 사진 프로젝트 '두 개의 이야기'를 통해서다. 그의 작업은 서울 한남동 파운드리 서울 지하를 가득 메웠다.

김용호는 예술 사진과 상업 사진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특한 이야기를 창조하는 사진작가다. 그는 일상 속 경험과 기억을 사진에 결합하며 '포토랭귀지'라는 새로운 사진 장르를 개척한 인물로도 잘 알려졌다. 박서보, 백남준, 정명훈 등 거장들의 인물 사진부터 현대자동차 기계를 담은 산업사진까지 경계를 정해두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그는 패션, 광고, 인물사진은 물론 무의식과 초현실적 세계를 사진으로 담아내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독특한 사진들은 기업과 예술계에서 모두 사랑받고 있다. 구찌가 사진전을 열기 위해 가장 먼저 그를 찾아간 것도 그의 사진 세계가 가진 매력 때문이다.
구찌 수트를 입고 휠체어에 앉은 이정재, 2005년 백남준의 시선으로 뉴욕 거리를 바라보다
이번 전시에서 김 작가는 사진기법 '딥틱'을 사용한 작품들을 내놨다. 인물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찍은 초상 바로 옆에 자연 혹은 오브제의 이미지를 병치하는 구성이다. 인물의 외형 뒤에 담긴 속내, 숨겨진 내밀한 사연을 바로 옆 사물로 표현했다. 영화감독 박찬욱의 얼굴을 찍은 사진 사이엔 매화 사진을 심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이 가진 탐미주의적 시선을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매화로 표현한 것이다.

백남준의 얼굴이 가득 담긴 사진 옆에는 그의 대표작 'TV 부처'에서 영감을 받아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이미지가 놓였다. 마치 불상이 백남준을 쳐다보는 듯 두 개의 사진을 배치했다. 작품 이름이 '백남준을 보는 반가사유상'인 이유다.
구찌 수트를 입고 휠체어에 앉은 이정재, 2005년 백남준의 시선으로 뉴욕 거리를 바라보다
인물의 얼굴 표정에 집중한 대형 연작도 벽 하나를 가득 메웠다. 안무가 안은미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 '희노애락애오욕'이 그것이다. 한국 사회 속, 예술을 통해 다양한 계층과 만나 온 그가 내면 속에 축적한 다양한 감정을 폭발시킨 작업이다. 얼굴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안은미가 가진 예술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전달한다.
구찌 수트를 입고 휠체어에 앉은 이정재, 2005년 백남준의 시선으로 뉴욕 거리를 바라보다
조성진의 24시간을 '밀착'한 작업도 나왔다. 김용호가 그의 뒤를 쫓으며 그가 무대에 올라가기까지의 시간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예술은 움직인다'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을 통해 관객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무대 밖에서 보내는 평범한 시간들을 엿볼 수 있다. 리허설을 하며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듯 피아노 건반 위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거나,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며 조식을 먹는 모습 등이 가감 없이 담겼다. 김용호가 사진으로 찍은 한 편의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바로 옆에는 조성진을 세계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은 '손가락' 사진들이 놓였다. 어둠 속 허공에서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듯 움직이는 손을 포착한 작업이다. 관객들로 하여금 조성진의 음악을 눈으로 볼 수 있게끔 연출했다. 관객은 피아노와 손가락이 만나 만들어내는 현란한 음을 몇 장의 사진을 통해 소리 하나 없이도 느껴볼 수 있다.
구찌 수트를 입고 휠체어에 앉은 이정재, 2005년 백남준의 시선으로 뉴욕 거리를 바라보다
김용호는 국내 대표 개념미술가 김수자를 렌즈 안에 담을 때에도 작가의 손에 주목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작업이 '바느질'이기 때문이다. 김수자는 1980년대부터 여성의 가사노동과 현대미술을 접목시킨 '바느질' 작품을 내놓으며 활동한 작가로 잘 알려졌다. 오랜 세월에 걸쳐 바느질, 설치, 회화를 그려 오며 굳은살이 자리잡은 그의 손을 클로즈업했다.

박찬욱이 영화를 연출하며 매일을 기록한 수첩을 찍기도 했다. 수수께끼, 혹은 암호처럼 늘어진 다양한 문장들은 관객에게 상상의 세계를 펼치게 만든다. 김용호가 박 감독을 작업실에서 만나 사진작업을 할 당시 발견한 노트를 한 장씩 펼치며 그 내용을 촬영했다. 한국어인데도 이해하지 못할 단어와 문장이 나열된 수첩이 마치 수수께끼 같다는 데서 영감을 얻었다. 작품에 고대 그리스어로 수수께끼를 뜻하는 '이니그마'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구찌 수트를 입고 휠체어에 앉은 이정재, 2005년 백남준의 시선으로 뉴욕 거리를 바라보다
구찌가 화려한 파티 대신 사진전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프닝을 찾은 실뱅 꼴라델 구찌코리아 대표의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구찌가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과 경외심을 표하기 위해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며 "한국 문화 저변을 넓힌 인물들을 조명하며 한국 관객, 고객들과 진지하게 만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연예인과 각종 인플루언서들의 잔치가 된 일회성 파티 대신 한국 문화를 진지하게 조명하고 다양한 층의 대중에게 선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전시는 10월 29일까지 이어진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