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 요절한 모던시인 박인환, 관 속엔 조니 워커와 카멜 담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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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기태의 처음 책 이야기
박인환 시집, 박인환 선시집(選詩集), 산호장, 1955년 10월 15일 발행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한
박인환 시인의 첫 시집
박인환 시집, 박인환 선시집(選詩集), 산호장, 1955년 10월 15일 발행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한
박인환 시인의 첫 시집
짧은 생을 모던하게 살다 간 시인 박인환의 생애와 작품 활동
지난 10월 18일 늦은 저녁 시간, 서울 혜화동 대학로에 있는 예술가의 집에서는 박인환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올해 수상자는 김승일 시인이었고, 부끄럽게도 필자는 박인환문학상 주관사에서 발행하는 문예지의 신인상 등단 상패를 받았다. 생전에 본 적은 없지만,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인이 아닐까 싶어 설레는 시간이었다.
준수한 용모에다 180cm의 훤칠한 키에 양복이 매우 잘 어울리는 멋쟁이로 유명했던 박인환(朴寅煥, 1926~1956) 시인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면사무소 직원이었고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다가 열한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41년 자퇴하고(영화에 심취해 있던 중학생 박인환이 영화관을 드나들다 교칙 위반으로 학교를 그만뒀다는 설도 있다),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3년제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광복을 맞아 학업을 그만두고 서울로 가서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이름의 서점을 열었다. 어쨌든 번듯한 학업을 내치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서점을 낸 것은 책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시인이 되기를 소망했던 박인환 스스로 문단의 여러 인사들과 사귀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와 친지의 도움을 받아 파고다공원 정문에서 동대문 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낙원동 입구에 20평 남짓한 크기의 서점을 냄으로써 시인을 향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실제로 박인환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김경린(金璟麟)·김수영(金洙暎)·오장환(吳章煥)·이한직(李漢稷) 등과 교류하면서 비로소 시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했다.
1948년, 운영난을 이기지 못해 마리서사의 문을 닫은 박인환은 당시 손님으로 서점을 드나들었던 진명여고 농구부 출신의 이정숙(李丁淑)과 덕수궁 석조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이 조선 왕족이어서 궁궐 결혼식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해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했다. 아울러 문학 운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1948년에는 김병욱(金秉旭)·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행했으며, 1949년에는 김수영·김경린·양병식(梁秉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피난을 가지 못해 지하에 숨어 사느라 고생한 박인환은 9·28 서울 수복 뒤 경향신문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1951년 1·4후퇴 때에는 피난을 서두른다. 그는 종군기자로 대구와 부산 오가며 김규동(金奎東)·김차영(金次榮)·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후반기(後半紀)’ 동인을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52년 <주간국제>의 ‘후반기 문예 특집’에 발표한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같은 도전적인 글을 발표함으로써 당대 문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1952년 박인환은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처삼촌의 주선으로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한다. 대한해운공사에 다니는 동안 그는 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날까지> 등을 발표한다. 환도령(還都令)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1955년 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 자격으로 미국과 태평양 연안을 여행하고 돌아와 조선일보에 기행문 <19일간의 아메리카>와 연작시 <아메리카 시초(詩抄)> 등을 발표했다.
이후 대한해운공사에서 퇴직한 박인환은 한동안 시작(詩作)에만 몰두한 끝에 그해 10월 첫 시집 <선시집>을 펴냈다. 이 시집에는 박인환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목마와 숙녀>는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어 널리 알려졌다. 1956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쓴 것으로 알려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했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박세형(朴世馨) 등 가족이 시집 <목마와 숙녀>를 발행한 바 있다.
생전에 남긴 유일한 시집 <선시집>의 이모저모
<선시집>은 1955년 장만영(張萬榮, 1914~1975) 시인이 운영하던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에서 발행한 박인환의 첫 시집이자 생전에 나온 유일한 시집이다. 원래 양장제본으로 1955년 10월 15일을 발행일로 하여 출간되었으나 출판사 화재로 인해 기증본 몇 부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燒失)되어 1956년 1월에 호부장(糊附裝; 제본할 때, 철사를 써서 책·잡지 등을 매고 표지를 씌우는 제본 방식) 제책 방식으로 다시 찍었다. 다만, 간기면에는 발행일을 소실된 초판 그대로 표기했다고 한다. 책 크기는 가로 150mm, 세로 195mm이며 본문 239쪽에 걸쳐 56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실려있고, 말미에 작자의 후기(後記)가 있다.
먼저 표지를 보면 앞뒤 표지와 날개까지 모두 어두운 녹색 계열의 추상화가 바탕에 깔려 있고, 앞표지 상단에 한자로 두 줄에 걸쳐 이름과 시집 제목 ‘朴寅煥(박인환)/選詩集(선시집)’이 손글씨로 표기되어 있다. 누구의 글씨일까 궁금했는데 표지를 넘겨보고 나서 그 의문이 바로 풀렸다. 앞표지 다음에 나오는 면지(面紙)에 사람인지 장소인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지만 ‘용장(容章)이’라는 문구와 함께 시인이 자기 이름을 자필로 써놓았는데, 그 필체가 표지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곧 박인환 시인이 시집 제목을 직접 써넣은 것으로 보인다. 면지를 넘기면 속표지가 나온다. 여기에는 상단에 시집 제목과 시인 이름이 활자체로 인쇄되어 있고, 하단에는 1955년에 서울 산호장에서 간행되었다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그다음 쪽에는 같은 내용의 영문 속표지가 나온다. 그리고 영문 속표지 뒷면을 보면 상단 중앙에 세로로 “아내 丁淑(정숙)에게 보낸다”는 헌사(獻詞)가 담겨 있다. 그다음으로 제목만 세로로 인쇄된 속표지가 한 번 더 나오고, 그 뒷면부터 6쪽에 걸쳐 목차가 자리 잡고 있다. 목차를 보면 모두 4부에 걸쳐 56편의 제목이 해당 쪽수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제1부 ‘서적(書籍)과 풍경(風景)’에는 <세 사람의 가족> <최후의 회화> <낙하(落下)> <영원한 일요일> <눈을 뜨고도> <행복> <미스터 모(某)의 생과 사>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센치멘탈 쨔아니> 등 26편, 제2부 ‘아메리카 시초(詩抄)’에는 <태평양에서> <십오일간> <충혈(充血)된 눈동자> <다리 위의 사람> <투명(透明)한 바라이에티> 등 11편, 제3부 ‘영원한 서장(序章)’에는 <어린 딸에게> <한줄기 눈물도 없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검은 강> <서부전선(西部戰線)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새로운 결의(決意)를 위하여> 등 11편, 제4부 ‘서정(抒情) 또는 잡초(雜草)’에는 <식물(植物)> <서정가(抒情歌)> <식민항(植民港)의 밤> <불행한 샨송> <사랑의 Parabola> <전원(田園)> 등 9편이 각각 실려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대체로 1950년대의 도시적 우울과 감상을 신선하고 리듬감 있는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목마와 숙녀>에서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도시적인 비애와 우울을 서정적인 심상(心象)들과 결합 속도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다분히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도 전후(戰後)의 어두운 현실과 풍속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집에 실린 <목마와 숙녀>의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선시집>을 제대로 펴낸 것을 기념하여 1956년 1월에는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백석(白石, 1912~1996) 시인이 축사했고, 배우 노경희(盧耕姬, 1929~1995)가 시 낭송을 했으며, 가수 현인(玄仁, 1919~2002)이 축가를 불렀다고 한다. 가을에는 우윳빛 레인코트를, 겨울에는 러시아풍의 깃 넓고 기다란 잿빛 외투 입기를 즐겼던, 완벽한 차림으로 올바른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시인의 생각은 이 시집 본문 마지막에 실려있는 ‘후기(後記)’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띄어쓰기를 제외하고 원문 그대로 옮김).
마지막으로 간기면(刊記面)을 보면 비교적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발행인 ‘장만영’, 인쇄소 ‘청구출판사’, 발행소 ‘산호장’, 그리고 발행일과 함께 책값이 ‘700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점 마리서사 이야기
마리서사(茉莉書舍). 이미 언급한 것처럼 박인환 시인이 열아홉 살 때인 1945년 말에 차린 서점 이름이다. 서점 이름의 유래는 프랑스의 여성 시인이자 화가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마리 로랑생은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등과 교유하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에 일찍 눈을 떴고,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의 연인으로 장 콕토, 앙드레 지드 등과도 함께 어울리면서 프랑스 예술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박인환은 마리 로랑생의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에 매료되어 그의 이름을 따 서점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실제로 <女苑> 1956년 2월호에 실린 <회상/우리의 약혼시절_환경에의 유혹>이라는 글에서 박인환은 “우리는 그때 ‘아포리겔’(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많이 읽었습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나의 청춘이 흐른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라는 그것이 좋아서 밤이면 함께 거닐 때 암송도 했었습니다. 나는 그를 되도록 정서의 세계에 접근시키려고 애썼고 그러한 것을 아내 될 사람이 또한 즐겼기 때문에 무척 마음이 행복했었습니다.”라고 썼다. 마리 로랑생과 더불어 연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영향도 함께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박인환은 유난히도 책을 좋아했다. 위의 같은 글에서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책을 즐겨 읽었는지 알 수 있다.
서점 마리서사는 20평 남짓한 작은 규모였지만 서구예술과 문학 관련 책이 많다는 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술가들이 모이는 종로의 명소가 되었다.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마리’를 가져왔지만 이를 한자로 표기하기에 적당한 단어를 찾던 박인환은 일본 모더니즘 계열 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1898~1965]의 시집 ‘군함 말리(軍艦茉莉)’에서 ‘말리(茉莉)’를 ‘마리’로 차용했다.
마리서사에서는 신간(新刊)뿐만 아니라 중고(中古) 도서를 함께 취급했다. 광복 후 혼란기 속에서 국내 도서의 발행이 활발하지 못한 탓도 있었기에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일본에서 간행된 세계 여러 문인의 시집과 소설집, 그리고 화집(畫集)이 서가를 장식했다. 이내 당대의 쟁쟁한 문인이었던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이시우, 이한직, 이흡 등이 단골손님이 되었고, 청년 문사(文士)였던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 등도 이 서점을 드나들면서 박인환과 교분을 쌓았다.
새로운 경향의 미술에 눈을 뜬 화가들도 드나들었고, 영화인들도 모여들었다. 김수영 시인은 수필 <마리서사>에서 당시의 서점 분위기를 가리켜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뜨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고 술회했다. 문학을 열망해서 책방을 차렸던 청년 박인환은, 당시 한낱 시인 지망생에 불과했던 박인환은 마리서사에서 당대의 모더니스트를 자처하며 자유분방하게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갔던 예술가들과 어울리면서 특유의 문학적 기반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좌우 문단의 분위기와 달리 마리서사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자유롭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될 새로운 예술적 경향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렇게 마리서사는 광복 후 새로운 예술적 경향이 무르익는 마당이 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김기림(金起林, 1907~2000) 등에 의해 한반도에 뿌리를 내렸던 모더니즘 시운동의 기운이 문단의 새로운 세대에게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마리서사’라는 공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박인환은 경제적으로 경영난에 허덕이다 개점 후 3년이 채 되지 않은 1948년에 마리서사의 문을 닫고 말았다. 사람들은 많이 찾아왔지만, 책이 많이 팔리지는 않았던 탓이었다. 다만, 수많은 예술가와의 교분과 더불어 평생의 배필을 만났으니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박인환과 김수영의 애증 관계 혹은 문학적 갈등
마리서사의 단골손님 중에 박인환과 어울리면서 함께 문학적 열정을 키운 인물로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박인환보다 다섯 살 위인 김수영은 수필 <박인환>에서 “그처럼 재주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다”라고 박인환을 회고한 바 있다. 좀 더 들어가 보면 다음과 같은 글 속에 김수영의 본심이 담겨 있다.
얼핏 표면적으로만 보면 박인환을 헐뜯는 듯하지만, 사실 이 글은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영전(靈前)에 바친 우정어린 만사[輓詞, 죽음을 애도하는 글. 만장(輓章)이라고도 함]로 읽어야 한다. 박인환 시인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쓴 글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시여 침을 뱉으라.”고 갈파했던 김수영은 당시에는 문학적 동반자였고 술친구였던 박인환과 자주 서울 명동거리에서 어울렸다. 두 사람은 1949년에 김경린, 임호권, 양병식 등과 발간한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동인(同人) 활동을 같이할 정도면 어떤 식으로든 통하는 사이였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지만 박인환은 같이 참여한 합동 시집에 김수영이 발표한 <공자(孔子)의 생활난>이란 시와 1945년 <예술부락>에 발표한 김수영의 등단작 <묘정(廟庭)의 노래>를 매우 싫어했다. 두 사람은 해방 이후 같은 모더니즘을 추구했지만, 이처럼 시의 실질적인 바탕은 달랐다. 나아가 김수영은 영어 실력이 뛰어나서 서양 책을 통해 모더니즘에 눈을 떴으며, 강원도 인제 출신으로 평양의전에서 공부하다 서울로 와 ‘모더니스트’ 행세하는 박인환이 싫었다.
김수영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나면 집에 두지 않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그것을 흉내 낼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 책들을 마리서사에 팔러 갈 때면 박인환이 쓴 시를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 김수영은 파격적인 시어(詩語)를 즐겨 쓴 박인환의 시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김수영은 박인환이 마리서사를 차릴 때 도움을 준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朴一英)을 존경해마지 않았다.
박일영은 구보(丘甫) 박태원(朴泰遠)의 아들로, 극장 간판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던 화가였는데, 박인환은 그로부터 진정한 전위예술(前衛藝術)과 모더니즘의 본질이라든가 세상을 진단하는 예술가의 양심 등은 배우지 않고, 겉멋만 들었다고 보았다. (아마도 <선시집>의 표지 그림을 그린 이가 박일영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심지어 나중에는 박인환을 요절한 천재 시인으로 평가하는 문단의 분위기에 공감하지 않았다.
평론 <참여시의 정리>에서는 4·19혁명 이후 이른바 참여시가 정치이념 또는 행동주의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박인환이 주도한 모더니즘 시운동을 실패의 사례로 들고 있다. 그러면서도(박인환 전문가 맹문재 시인에 따르면) 김수영은 “좌우 이념의 구별이 없고 글 쓰는 사람과 그 밖의 사람들의 문명(文名)이 아니라 인간성을 중심으로 어울릴 수 있는 마리서사를 마련해준 면”에서는 박인환의 모더니즘 시운동과 함께 새로운 시어의 사용에 대한 박인환의 열정도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김수영 시인이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뒤 어느 날 박인환이 보여주는 시를 읽게 되었는데, 작품에 쓰인 어색한 낱말을 지적하자 박인환이 “이건 네가 포로수용소 안에 있을 에 새로 생긴 말이야.”(수필 <박인환> 중에서)라고 반격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김수영은 박인환의 그런 언행에 증오심을 품으면서도 시어에 대한 열정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단다. 이처럼 박인환의 새로운 시어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김수영이 박인환을 호명한 시 <거대한 뿌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김수영은 이 작품에서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의 시어를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박인환이 추구한 모더니즘 시어에 민중성을 보태어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읊고 있다. 김수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대학을 다니면서도 4년 동안 제철 회사에서 일한 김병욱(金秉旭), 그리고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서 65세를 넘긴 나이에 조선을 네 차례나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는데, 박인환의 시어 인식을 수용해 이를 작품 속에서 확장한 것이다.
어쨌든 박인환은 자신 역시 어려운 여건이었음에도 김수영의 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수영에게 밥과 술을 자주 샀고, 김수영 몰래 그의 부인에게 생활비를 보태주기도 했다. 이 같은 두 사람의 애증 관계에 대해 정일근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제 내년이면 <선시집>이 세상에 나온 지, 그리고 박인환 시인이 하늘로 간 지 70년이 된다. 인생을 통속적인 대중 잡지의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노래한 박인환은 시인 이상(李箱)을 좋아했다. 술은 조니 워커 위스키를 즐겨 마셨고, 담배는 카멜(CAMEL)을 주로 피웠다. 이상의 기일(忌日)인 1956년 3월 17일 오후부터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이상 시인을 기리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이상이 실제로 세상을 떠난 것은 1937년 4월 17일 새벽이다.)
이렇게 시작된 폭음(暴飮)은 사흘 동안 이어졌고, 결국 3월 20일 밤 9시경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지금의 교보빌딩 부근) 자택에서 급성 알코올 중독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자택이 아닌 광화문 거리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이상 시인을 그리다 그이처럼 요절(夭折)했다. 박인환은 아내와 어린 자녀들(세형, 세화, 세곤)을 못 잊어 그랬는지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박인환의 장례식에서 동료 문인들은 그의 관 속에 조니 워커 위스키와 카멜 담배를 넣어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1976년에 가족들은 <선시집>에 수록된 시 56편 중 54편과 유작(遺作) 등 미수록 시 7편 등 모두 61편의 시가 실린 시집 <목마와 숙녀>를 펴냈다. 이 시집에는 박인환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알려진 <세월이 가면>도 실려 있다. 박인환 생전에 이진섭이 작곡하고 이후 나애심 등 여러 가수가 불러 유명해진 이 작품은 <목마와 숙녀>와 함께 박인환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그가 태어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에는 2012년에 개관한 [박인환문학관]이 있다. 광화문 혹은 을지로 골목 대폿집에서 아직도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세상일까. 생애의 마지막 시점에서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고 노래했던 박인환 시인이 그리운 날이다. 김기태 '처음책방' 설립자
지난 10월 18일 늦은 저녁 시간, 서울 혜화동 대학로에 있는 예술가의 집에서는 박인환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올해 수상자는 김승일 시인이었고, 부끄럽게도 필자는 박인환문학상 주관사에서 발행하는 문예지의 신인상 등단 상패를 받았다. 생전에 본 적은 없지만, 가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인이 아닐까 싶어 설레는 시간이었다.
준수한 용모에다 180cm의 훤칠한 키에 양복이 매우 잘 어울리는 멋쟁이로 유명했던 박인환(朴寅煥, 1926~1956) 시인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면사무소 직원이었고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다가 열한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1939년 서울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41년 자퇴하고(영화에 심취해 있던 중학생 박인환이 영화관을 드나들다 교칙 위반으로 학교를 그만뒀다는 설도 있다),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3년제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광복을 맞아 학업을 그만두고 서울로 가서 ‘마리서사(茉莉書肆)’라는 이름의 서점을 열었다. 어쨌든 번듯한 학업을 내치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서점을 낸 것은 책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시인이 되기를 소망했던 박인환 스스로 문단의 여러 인사들과 사귀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와 친지의 도움을 받아 파고다공원 정문에서 동대문 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낙원동 입구에 20평 남짓한 크기의 서점을 냄으로써 시인을 향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실제로 박인환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김경린(金璟麟)·김수영(金洙暎)·오장환(吳章煥)·이한직(李漢稷) 등과 교류하면서 비로소 시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46년에 시 <거리>를 <국제신보>에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47년에는 시 <남풍>, 영화평론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신천지>에, 1948년에는 시 <지하실(地下室)>을 <민성(民聲)>에 발표했다.
1948년, 운영난을 이기지 못해 마리서사의 문을 닫은 박인환은 당시 손님으로 서점을 드나들었던 진명여고 농구부 출신의 이정숙(李丁淑)과 덕수궁 석조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이 조선 왕족이어서 궁궐 결혼식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해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했다. 아울러 문학 운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1948년에는 김병욱(金秉旭)·김경린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행했으며, 1949년에는 김수영·김경린·양병식(梁秉植)·임호권(林虎權) 등과 함께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펴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피난을 가지 못해 지하에 숨어 사느라 고생한 박인환은 9·28 서울 수복 뒤 경향신문 종군기자로 활동하다가 1951년 1·4후퇴 때에는 피난을 서두른다. 그는 종군기자로 대구와 부산 오가며 김규동(金奎東)·김차영(金次榮)·이봉래(李奉來) 등과 피난지 부산에서 ‘후반기(後半紀)’ 동인을 결성하여 모더니즘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52년 <주간국제>의 ‘후반기 문예 특집’에 발표한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 같은 도전적인 글을 발표함으로써 당대 문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1952년 박인환은 경향신문사를 그만두고 처삼촌의 주선으로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한다. 대한해운공사에 다니는 동안 그는 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떠한 날까지> 등을 발표한다. 환도령(還都令)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1955년 봄, 화물선 ‘남해호’의 사무장 자격으로 미국과 태평양 연안을 여행하고 돌아와 조선일보에 기행문 <19일간의 아메리카>와 연작시 <아메리카 시초(詩抄)> 등을 발표했다.
이후 대한해운공사에서 퇴직한 박인환은 한동안 시작(詩作)에만 몰두한 끝에 그해 10월 첫 시집 <선시집>을 펴냈다. 이 시집에는 박인환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으며 특히 대표작으로 꼽히는 <목마와 숙녀>는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어 널리 알려졌다. 1956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쓴 것으로 알려진 <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했다. 1976년 그의 20주기를 맞아 장남 박세형(朴世馨) 등 가족이 시집 <목마와 숙녀>를 발행한 바 있다.
생전에 남긴 유일한 시집 <선시집>의 이모저모
<선시집>은 1955년 장만영(張萬榮, 1914~1975) 시인이 운영하던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에서 발행한 박인환의 첫 시집이자 생전에 나온 유일한 시집이다. 원래 양장제본으로 1955년 10월 15일을 발행일로 하여 출간되었으나 출판사 화재로 인해 기증본 몇 부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燒失)되어 1956년 1월에 호부장(糊附裝; 제본할 때, 철사를 써서 책·잡지 등을 매고 표지를 씌우는 제본 방식) 제책 방식으로 다시 찍었다. 다만, 간기면에는 발행일을 소실된 초판 그대로 표기했다고 한다. 책 크기는 가로 150mm, 세로 195mm이며 본문 239쪽에 걸쳐 56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실려있고, 말미에 작자의 후기(後記)가 있다.
먼저 표지를 보면 앞뒤 표지와 날개까지 모두 어두운 녹색 계열의 추상화가 바탕에 깔려 있고, 앞표지 상단에 한자로 두 줄에 걸쳐 이름과 시집 제목 ‘朴寅煥(박인환)/選詩集(선시집)’이 손글씨로 표기되어 있다. 누구의 글씨일까 궁금했는데 표지를 넘겨보고 나서 그 의문이 바로 풀렸다. 앞표지 다음에 나오는 면지(面紙)에 사람인지 장소인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지만 ‘용장(容章)이’라는 문구와 함께 시인이 자기 이름을 자필로 써놓았는데, 그 필체가 표지의 그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곧 박인환 시인이 시집 제목을 직접 써넣은 것으로 보인다. 면지를 넘기면 속표지가 나온다. 여기에는 상단에 시집 제목과 시인 이름이 활자체로 인쇄되어 있고, 하단에는 1955년에 서울 산호장에서 간행되었다는 사실이 새겨져 있다. 그다음 쪽에는 같은 내용의 영문 속표지가 나온다. 그리고 영문 속표지 뒷면을 보면 상단 중앙에 세로로 “아내 丁淑(정숙)에게 보낸다”는 헌사(獻詞)가 담겨 있다. 그다음으로 제목만 세로로 인쇄된 속표지가 한 번 더 나오고, 그 뒷면부터 6쪽에 걸쳐 목차가 자리 잡고 있다. 목차를 보면 모두 4부에 걸쳐 56편의 제목이 해당 쪽수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제1부 ‘서적(書籍)과 풍경(風景)’에는 <세 사람의 가족> <최후의 회화> <낙하(落下)> <영원한 일요일> <눈을 뜨고도> <행복> <미스터 모(某)의 생과 사>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센치멘탈 쨔아니> 등 26편, 제2부 ‘아메리카 시초(詩抄)’에는 <태평양에서> <십오일간> <충혈(充血)된 눈동자> <다리 위의 사람> <투명(透明)한 바라이에티> 등 11편, 제3부 ‘영원한 서장(序章)’에는 <어린 딸에게> <한줄기 눈물도 없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 <검은 강> <서부전선(西部戰線)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새로운 결의(決意)를 위하여> 등 11편, 제4부 ‘서정(抒情) 또는 잡초(雜草)’에는 <식물(植物)> <서정가(抒情歌)> <식민항(植民港)의 밤> <불행한 샨송> <사랑의 Parabola> <전원(田園)> 등 9편이 각각 실려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대체로 1950년대의 도시적 우울과 감상을 신선하고 리듬감 있는 언어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목마와 숙녀>에서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도시적인 비애와 우울을 서정적인 심상(心象)들과 결합 속도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다분히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도 전후(戰後)의 어두운 현실과 풍속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독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집에 실린 <목마와 숙녀>의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木馬와 淑女특히 이 시집은 흔히 '청록파(靑鹿派)'로 대변되던 전원(田園) 탐구 혹은 자연 회귀(回歸)의 시풍(詩風)에 대한 반발로도 읽힌다. 『청록집』이 자연을 고풍스럽고 토속적인 정서에 기반하여 노래함으로써 공감을 얻었다면, 박인환 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도시 문명을 대상으로 삼아 비유와 상징 등을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바아지니아•울프의 生涯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主人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傷心한 별은 내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少女는
庭園의 草木옆에서 자라고
文學이 죽고 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 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마슴의 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木馬소리를 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바아지니아•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雜誌의 表紙처럼 通俗 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 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선시집>을 제대로 펴낸 것을 기념하여 1956년 1월에는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백석(白石, 1912~1996) 시인이 축사했고, 배우 노경희(盧耕姬, 1929~1995)가 시 낭송을 했으며, 가수 현인(玄仁, 1919~2002)이 축가를 불렀다고 한다. 가을에는 우윳빛 레인코트를, 겨울에는 러시아풍의 깃 넓고 기다란 잿빛 외투 입기를 즐겼던, 완벽한 차림으로 올바른 정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시인의 생각은 이 시집 본문 마지막에 실려있는 ‘후기(後記)’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띄어쓰기를 제외하고 원문 그대로 옮김).
나는 10여 년 동안 시를 써왔다. 이 세대(世代)는 세계사(世界史)가 그러한 것과 같이 참으로 기묘(奇妙)한 불안정(不安定)한 연대(年代)였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苦痛)을 준 것이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의지(依支)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指導者)도 아니며 정치가(政治家)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
신조(信條)치고 동요되지 아니한 것이 없고 공인(公認)되어온 교리(敎理)치고 마침내 결함(缺陷)을 노정(露呈)하지 아니한 것이 없고 또 용인(容認)된 전통(傳統)치고 위태(危殆)에 임(臨)하지 아니한 것이 없는 것처럼 나의 시의 모든 작용도 이 10년 동안에 여러 가지로 변하였으나 본질적(本質的)인 시에 대한 정조(情操)와 신념(信念)만을 무척 지켜온 것으로 생각한다.
처음 이 시집(詩集)은 <검은 준열(峻烈)의 시대(時代)>라고 제(題)할려고 했든 것을 지금과 같이 고치고 4부로 나누었다. 집필연월순(執筆年月順)도 아니며 단지 서로의 시가 가지는 관련성(關聯性)과 나의 구분(區分)해 볼려는 습성(習性)에서 온 것인데 도리혀 독자(讀者)에게는 쓸데없는 일을 한 것 같다.
여하튼 나는 우리가 걸어온 길과 갈 길 그리고 우리를 자신의 분열(分裂)한 정신을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내 보이며 순수한 본능(本能)과 체험(體驗)을 통해 본 불안(不安)과 희망(希望)의 두 세계에서 어떠한 것을 써야 하는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여기에 실은 작품들을 발표했었다.
끝으로 뜻깊은 조국의 해방을 10주년째 맞이하는 가을날 부완혁(夫琓爀) 선생과 이형우(李亨雨) 씨의 힘으로 나의 최초의 선시집(選詩集)을 간행(刊行)하게 된 것을 감사(感謝)하는 바이다.
1955년 9월 30일한편, 후기에서 이 시집의 발행에 두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중 ‘부완혁’은 일제강점기부터 관료를 거쳐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었던 인물인 듯하며, ‘이형우’는 어떤 인물인지 알 길이 없다.
저자(著者)
마지막으로 간기면(刊記面)을 보면 비교적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발행인 ‘장만영’, 인쇄소 ‘청구출판사’, 발행소 ‘산호장’, 그리고 발행일과 함께 책값이 ‘700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점 마리서사 이야기
마리서사(茉莉書舍). 이미 언급한 것처럼 박인환 시인이 열아홉 살 때인 1945년 말에 차린 서점 이름이다. 서점 이름의 유래는 프랑스의 여성 시인이자 화가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마리 로랑생은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등과 교유하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에 일찍 눈을 떴고,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의 연인으로 장 콕토, 앙드레 지드 등과도 함께 어울리면서 프랑스 예술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박인환은 마리 로랑생의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에 매료되어 그의 이름을 따 서점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실제로 <女苑> 1956년 2월호에 실린 <회상/우리의 약혼시절_환경에의 유혹>이라는 글에서 박인환은 “우리는 그때 ‘아포리겔’(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많이 읽었습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나의 청춘이 흐른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라는 그것이 좋아서 밤이면 함께 거닐 때 암송도 했었습니다. 나는 그를 되도록 정서의 세계에 접근시키려고 애썼고 그러한 것을 아내 될 사람이 또한 즐겼기 때문에 무척 마음이 행복했었습니다.”라고 썼다. 마리 로랑생과 더불어 연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영향도 함께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박인환은 유난히도 책을 좋아했다. 위의 같은 글에서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책을 즐겨 읽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그 무렵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책은 반드시 상대에게 빌려주고 남자를 이해하고 함께 오래 살아가려면 내가 본 책을 반드시 읽어달라고 권했습니다.
며칠 후면 독후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제가 되어 우리는 서적의 인물이나 작가의 의도와 사상에 관해 참으로 진지한 의견도 교환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약혼자들도 그러할 줄 아오나 좋은 일을 나도 했고 나하고 자찬합니다.
얼마 전 내 아내는 “요즘 나는 당신과 거리가 멀어진 것 같소.”
하기에 나는,
“당신은 어린애도 기르고 살림이 고된 까닭에 책을 보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요?”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서점 마리서사는 20평 남짓한 작은 규모였지만 서구예술과 문학 관련 책이 많다는 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술가들이 모이는 종로의 명소가 되었다.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마리’를 가져왔지만 이를 한자로 표기하기에 적당한 단어를 찾던 박인환은 일본 모더니즘 계열 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 1898~1965]의 시집 ‘군함 말리(軍艦茉莉)’에서 ‘말리(茉莉)’를 ‘마리’로 차용했다.
마리서사에서는 신간(新刊)뿐만 아니라 중고(中古) 도서를 함께 취급했다. 광복 후 혼란기 속에서 국내 도서의 발행이 활발하지 못한 탓도 있었기에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일본에서 간행된 세계 여러 문인의 시집과 소설집, 그리고 화집(畫集)이 서가를 장식했다. 이내 당대의 쟁쟁한 문인이었던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이시우, 이한직, 이흡 등이 단골손님이 되었고, 청년 문사(文士)였던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 등도 이 서점을 드나들면서 박인환과 교분을 쌓았다.
새로운 경향의 미술에 눈을 뜬 화가들도 드나들었고, 영화인들도 모여들었다. 김수영 시인은 수필 <마리서사>에서 당시의 서점 분위기를 가리켜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뜨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고 술회했다. 문학을 열망해서 책방을 차렸던 청년 박인환은, 당시 한낱 시인 지망생에 불과했던 박인환은 마리서사에서 당대의 모더니스트를 자처하며 자유분방하게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갔던 예술가들과 어울리면서 특유의 문학적 기반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좌우 문단의 분위기와 달리 마리서사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자유롭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될 새로운 예술적 경향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렇게 마리서사는 광복 후 새로운 예술적 경향이 무르익는 마당이 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김기림(金起林, 1907~2000) 등에 의해 한반도에 뿌리를 내렸던 모더니즘 시운동의 기운이 문단의 새로운 세대에게 이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마리서사’라는 공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박인환은 경제적으로 경영난에 허덕이다 개점 후 3년이 채 되지 않은 1948년에 마리서사의 문을 닫고 말았다. 사람들은 많이 찾아왔지만, 책이 많이 팔리지는 않았던 탓이었다. 다만, 수많은 예술가와의 교분과 더불어 평생의 배필을 만났으니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박인환과 김수영의 애증 관계 혹은 문학적 갈등
마리서사의 단골손님 중에 박인환과 어울리면서 함께 문학적 열정을 키운 인물로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박인환보다 다섯 살 위인 김수영은 수필 <박인환>에서 “그처럼 재주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다”라고 박인환을 회고한 바 있다. 좀 더 들어가 보면 다음과 같은 글 속에 김수영의 본심이 담겨 있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을 때도 나는 장례식에를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의 비석을 제막할 때는 망우리 산소에 나간 기억이 있다. <중략>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말발도 서지 않는 후기.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포롱’이 다 뭐냐? <이하 생략>
- 김수영 산문 <박인환> 중에서
얼핏 표면적으로만 보면 박인환을 헐뜯는 듯하지만, 사실 이 글은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영전(靈前)에 바친 우정어린 만사[輓詞, 죽음을 애도하는 글. 만장(輓章)이라고도 함]로 읽어야 한다. 박인환 시인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쓴 글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시여 침을 뱉으라.”고 갈파했던 김수영은 당시에는 문학적 동반자였고 술친구였던 박인환과 자주 서울 명동거리에서 어울렸다. 두 사람은 1949년에 김경린, 임호권, 양병식 등과 발간한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동인(同人) 활동을 같이할 정도면 어떤 식으로든 통하는 사이였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지만 박인환은 같이 참여한 합동 시집에 김수영이 발표한 <공자(孔子)의 생활난>이란 시와 1945년 <예술부락>에 발표한 김수영의 등단작 <묘정(廟庭)의 노래>를 매우 싫어했다. 두 사람은 해방 이후 같은 모더니즘을 추구했지만, 이처럼 시의 실질적인 바탕은 달랐다. 나아가 김수영은 영어 실력이 뛰어나서 서양 책을 통해 모더니즘에 눈을 떴으며, 강원도 인제 출신으로 평양의전에서 공부하다 서울로 와 ‘모더니스트’ 행세하는 박인환이 싫었다.
김수영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나면 집에 두지 않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이 그것을 흉내 낼지도 모른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 책들을 마리서사에 팔러 갈 때면 박인환이 쓴 시를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때 김수영은 파격적인 시어(詩語)를 즐겨 쓴 박인환의 시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김수영은 박인환이 마리서사를 차릴 때 도움을 준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朴一英)을 존경해마지 않았다.
박일영은 구보(丘甫) 박태원(朴泰遠)의 아들로, 극장 간판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던 화가였는데, 박인환은 그로부터 진정한 전위예술(前衛藝術)과 모더니즘의 본질이라든가 세상을 진단하는 예술가의 양심 등은 배우지 않고, 겉멋만 들었다고 보았다. (아마도 <선시집>의 표지 그림을 그린 이가 박일영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심지어 나중에는 박인환을 요절한 천재 시인으로 평가하는 문단의 분위기에 공감하지 않았다.
평론 <참여시의 정리>에서는 4·19혁명 이후 이른바 참여시가 정치이념 또는 행동주의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박인환이 주도한 모더니즘 시운동을 실패의 사례로 들고 있다. 그러면서도(박인환 전문가 맹문재 시인에 따르면) 김수영은 “좌우 이념의 구별이 없고 글 쓰는 사람과 그 밖의 사람들의 문명(文名)이 아니라 인간성을 중심으로 어울릴 수 있는 마리서사를 마련해준 면”에서는 박인환의 모더니즘 시운동과 함께 새로운 시어의 사용에 대한 박인환의 열정도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김수영 시인이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뒤 어느 날 박인환이 보여주는 시를 읽게 되었는데, 작품에 쓰인 어색한 낱말을 지적하자 박인환이 “이건 네가 포로수용소 안에 있을 에 새로 생긴 말이야.”(수필 <박인환> 중에서)라고 반격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김수영은 박인환의 그런 언행에 증오심을 품으면서도 시어에 대한 열정만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단다. 이처럼 박인환의 새로운 시어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김수영이 박인환을 호명한 시 <거대한 뿌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김수영은 이 작품에서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등의 시어를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박인환이 추구한 모더니즘 시어에 민중성을 보태어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읊고 있다. 김수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대학을 다니면서도 4년 동안 제철 회사에서 일한 김병욱(金秉旭), 그리고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서 65세를 넘긴 나이에 조선을 네 차례나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는데, 박인환의 시어 인식을 수용해 이를 작품 속에서 확장한 것이다.
어쨌든 박인환은 자신 역시 어려운 여건이었음에도 김수영의 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수영에게 밥과 술을 자주 샀고, 김수영 몰래 그의 부인에게 생활비를 보태주기도 했다. 이 같은 두 사람의 애증 관계에 대해 정일근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건 시를 떠난 인간의 문제일 것이다. 김수영은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의 박인환의 재능이 부러웠을 것이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온 박인환은 김수영을 형처럼 의지했을 것이다. 둘 다 콤플렉스 문제가 있었지만, 김수영은 감추지 못했고 박인환은 잘 감추었던 것이 아닐까. 아까운 것은 두 사람이 오래 살지 못하고 서른 살, 마흔다섯 살에 각각 세상을 떠나버려 정겨운 후일담이 문학판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남대학보>, [정일근의 발밤발밤] “창동에 인환의 '마리서사'가 문을 연다면” 중에서
이제 내년이면 <선시집>이 세상에 나온 지, 그리고 박인환 시인이 하늘로 간 지 70년이 된다. 인생을 통속적인 대중 잡지의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노래한 박인환은 시인 이상(李箱)을 좋아했다. 술은 조니 워커 위스키를 즐겨 마셨고, 담배는 카멜(CAMEL)을 주로 피웠다. 이상의 기일(忌日)인 1956년 3월 17일 오후부터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이상 시인을 기리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이상이 실제로 세상을 떠난 것은 1937년 4월 17일 새벽이다.)
이렇게 시작된 폭음(暴飮)은 사흘 동안 이어졌고, 결국 3월 20일 밤 9시경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지금의 교보빌딩 부근) 자택에서 급성 알코올 중독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자택이 아닌 광화문 거리에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이상 시인을 그리다 그이처럼 요절(夭折)했다. 박인환은 아내와 어린 자녀들(세형, 세화, 세곤)을 못 잊어 그랬는지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박인환의 장례식에서 동료 문인들은 그의 관 속에 조니 워커 위스키와 카멜 담배를 넣어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1976년에 가족들은 <선시집>에 수록된 시 56편 중 54편과 유작(遺作) 등 미수록 시 7편 등 모두 61편의 시가 실린 시집 <목마와 숙녀>를 펴냈다. 이 시집에는 박인환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알려진 <세월이 가면>도 실려 있다. 박인환 생전에 이진섭이 작곡하고 이후 나애심 등 여러 가수가 불러 유명해진 이 작품은 <목마와 숙녀>와 함께 박인환의 대표작으로 남았다.
그가 태어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상동리에는 2012년에 개관한 [박인환문학관]이 있다. 광화문 혹은 을지로 골목 대폿집에서 아직도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세상일까. 생애의 마지막 시점에서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고 노래했던 박인환 시인이 그리운 날이다. 김기태 '처음책방' 설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