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필수 요소인 의식주를 논할 때 가장 첫 번째로 거론되는 옷. 누구도 옷을 입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죠? 그리고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은 대부분 기성복을 입습니다. 기성복은 인류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꾼 발명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현대를 만든 물건들’ 가운데 하나로 기성복을 꼽기도 했습니다. (한겨레신문 칼럼, 2018) 기성복은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핵심적인 잇템이자 패션이 20세기에 주요 산업과 문화로 우뚝 서게 한 일등 공신이기도 합니다.

바쁜 현대인의 삶을 더욱 간편하게 바꾼 기성복은 한국에 언제, 그리고 누가 최초로 도입했을까요? 디자이너가 정식으로 만든 기성복이 최초로, 대량으로 판매된 것은 1966년. 반세기가 겨우 넘는 정도입니다. 지금은 기성복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지만,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기성복을 입기 시작한 것은 불과 60년이 채 안 된 겁니다.

그렇다면 한국인 체형 사이즈에 기반한 기성복을 한국에 최초로 도입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답을 알고 나서도 쉽게 믿기 힘든 의외의 인물입니다. 섬유나 원단을 생산하는 기업가나 국가 표준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아닌 일개 개인, 그것도 당시 30대의 젊은 여성이거든요. 주역은 ‘노라노’라는 한번 들으면 잊기 힘든 무척이나 개성 강한 이름을 지닌 인물입니다.
2012년 열린 노라노의 전시 'LA VIE EN ROSE' 포스터 이미지
2012년 열린 노라노의 전시 'LA VIE EN ROSE' 포스터 이미지
잠시 1950~60년대 한국으로 돌아가 볼까요? 이 시대는 기성복이란 개념이 아예 없었고, 일반 서민들은 동네 양장점에서 옷을 맞추거나, 옷감을 사서 집에서 직접 만들어 입던 시기였습니다. 참,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구제 옷들도 빼놓을 수 없죠. 남성들은 미군 군복을 그대로 입기도 했고, 미국 부대에서 나온 갖가지 옷들을 알뜰히 재활용해 다시 만들어 입었습니다. 여기까진 일반 서민들 상황입니다. 물론 이때도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에선 남성용 반소매 셔츠가 생활 간소화와 사치 근절이라는 국가 정책에 따라 대량으로 팔리기도 했습니다. 또 ‘시대복장사’(時代服裝社)라는 업체도 남성 셔츠를 생산했지만, 품목도 제한적이고 남성복에 국한됐죠.

상류층과 연예계는 형편이 좀 달랐습니다. 재력이 받쳐주던 계층들은 당시 유행의 중심이자 최대 번화가인 서울 명동의 유명 의상실에서 자신의 체형에 꼭 맞게 서양 옷감으로 고급 맞춤옷을 주문해서 입었습니다. 노라노는 바로 이런 상류층과 은막의 스타들이 첫손에 꼽는 당대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였습니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옷도 담당할 정도였으니 그 위상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영화 '노라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노라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사실 노라노 입장에서 보면, 계속 상류층과 연예인 등 고정 고객들을 위한 고급 맞춤옷을 만들며 하던 대로 사업을 이어가는 편이 개인적으로 훨씬 편했을 겁니다. 그런데 커리어의 정점에 있을 때 노라노는 아주 야심 차고도 위험한 도전을 합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성복 브랜드를 국내 최초로 도입하기로 마음을 먹은 거죠. 지금이야 기성복이 완전 대세이고 맞춤복은 아주 소수의 계층만 향유하지만, 당시는 한국에 기성복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던 개념이었습니다. 당연히 기성복이 과연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 너무나 불투명한 상황이었던 거죠. 심지어 당시 신문에는 ‘기성복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란 기사가 등장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도 ‘맞춤복의 여왕’이었던 노라노는 미증유의 아이템인 기성복을 원자폭탄처럼 한국 사회에 투하합니다. 승승장구하던 사업의 명운을 걸고 말이죠. 바로 이 지점이 저는 노라노라는 인물의 놀랍고 또 매력적인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기성복의 도입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과거의 시점에선 미래는 예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영화 '노라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노라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1960년대는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이고, 아직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은 도착하지 않은 시점. 기성복의 개념조차 없던 한국에서 기성복으로 사업의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한 도전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일이죠. 잘 나가는 맞춤옷 대신 한국에 없는 아이템인 기성복이라니. 누가 봐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두 번째로 미국행 비행기를 탄 여성(첫 번째는 성악가 김자경)으로 미국 대학에서 패션을 정식으로 공부했던 노라노는 기성복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는 확신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훗날 노라노는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 인생의 최고 성과로 ‘기성복 국내 최초 도입’을 꼽기도 할 만큼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있었던 거죠.

“제 패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게 여기는 일이 기성복을 최초로 만들었다는 사실이죠. 다수의 사람이 더 저렴한 가격에 더 멋진 옷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공익적인 일이죠. ‘노라야, 기성복을 도입한 일은 참 칭찬할 만한 일이야.’ 저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예요”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 마음산책. 2017)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 표지 / 사진출처. 교보문고 홈페이지
<노라노 우리 패션사의 시작> 표지 / 사진출처. 교보문고 홈페이지
기성복 제작의 핵심은 체형별 사이즈를 확보하는 일인데, 이미 십 수년간 다양한 여성들의 맞춤복을 제작하며 한국 여성 신체 사이즈를 축적한 노라노는 이를 기반으로 체형별 평균 사이즈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전 준비를 토대로 1963년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를 워커힐 크로바 클럽에서 개최합니다. 기성복 패션쇼가 성공한 뒤, 1966년 노라노는 자신의 명동 매장의 한 층을 기성복 매장으로 바꾸고, 미우만 백화점(훗날 미도파 백화점)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노라노 기성복 매장을 엽니다. 노라노 기성복은 출시 첫날 준비 수량을 모두 완판 시키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한국에도 기성복 시대가 본격 개막된 겁니다.

국내에서 기성복 브랜드를 성공시킨 후, 노라노의 도전은 미국 시장으로 이어집니다. 한국 원단으로 고급 여성복을 만들어서 세계 패션의 격전장인 미국 뉴욕에 진출하죠. 1980년대에 한국산 실크로 만든 고급 여성 패션복으로 1천만 달러 대미 수출 실적을 달성하는 경이적인 성과를 이룩합니다. 이에 앞서 노라노는 1956년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한(국내에서 처음으로 공식 패션쇼를 열어 한국 패션디자이너 1호로 불림) 디자이너, 파리 기성복 박람회 프레타포르테 최초 진출 등으로 한국 패션예술사에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남깁니다.
영화 '노라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노라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저는 그녀의 모든 업적 가운데서도 국내에 디자이너 기성복을 최초로 도입했다는 사실이 그 어떤 업적보다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편하게 자신의 체형에 맞는 옷을 손쉽게 사 입을 수 있게 된 상황은 우리의 삶을 참으로 편리하게 하는 혁명적인 변화니까요. 우리가 오늘날 너무나 당연하게 입는 기성복에는 이처럼 한국 전쟁 이후 불모의 대한민국에서 세상을 혁신적으로 바꾸고 싶었던 한 30대 여성의 도전 정신이 숨어 있습니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의지가 때론 세상을 단숨에 바꾸기도 한다는 사실을 노라노의 기성복에서 다시금 확인합니다.
영화 '노라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영화 '노라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최효안 예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