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던 제조업체 인텔·보잉의 경영 위기가 미국 경제의 주요 리스크로 지목됐다. 이들 기업이 대규모 감원으로 고용시장에 타격을 주고, 반도체·항공기 등 주요 제조업 주도권을 유럽과 중국 등에 넘기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때 최첨단 기술로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인텔과 보잉이 이젠 “미국의 잠재적 재앙”(월스트리트저널·WSJ)으로 불리고 있다.

○창사 후 최대 위기 맞은 ‘제조업 제왕’

"자랑에서 재앙됐다"…잘나가던 국가대표 기업의 추락
22일(현지시간) 기준 뉴욕증시에 상장된 보잉은 주가가 올 들어 36.5% 급락했다. 같은 기간 인텔 주가는 53.15% 폭락했다. 뉴욕증시를 대표하는 S&P500지수와 동조화하긴커녕 정반대 흐름을 나타냈다. 이 기간 S&P500지수는 23.37% 올랐다.

이런 보잉·인텔의 주가 흐름은 창사 후 최대 위기를 맞은 두 기업의 현 상황을 대변한다. 세계 최대 항공기 제조업체 보잉은 16년 만의 파업으로 홍역을 치렀다. 노동조합이 4년간 35% 임금 인상안에 잠정 합의해 5주간 이어진 파업이 마무리될 가능성이 커졌지만 깊은 생채기가 남았다.

항공기 제작 결함으로 경영난에 허덕이던 보잉은 파업과 맞물려 항공기 생산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맞았다. 파업 기간 손실만 10억달러였다. 파업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전체 직원의 10%에 달하는 1만7000명의 감원을 계획 중이다. 정상화까지 험로가 예상되면서 보잉의 대규모 감원이 미국 고용지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보잉의 위기는 예고된 결과다. 보잉은 원가 절감을 위해 핵심 부품을 외주업체에 맡겼고 숙련 엔지니어를 대거 해고했다.

‘반도체 제왕’으로 군림하던 인텔은 다른 기업의 인수 대상으로 전락했다. PC 시장 포화 이후 모바일과 인공지능(AI) 시대가 열렸지만 한순간 실기로 변화 흐름에 뒤처진 탓이다. 최악의 실적을 낸 인텔은 전체의 15% 감원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추진 중이다.

인텔은 AI 열풍을 예상하지 못했다.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에 2017년 챗GPT 개발사인 오픈AI의 지분을 확보할 기회를 걷어찬 게 대표적 사례다. 애플의 첫 아이폰에 반도체를 공급하는 것도 충분한 이익이 나지 않는다면서 포기했다. 로이터통신은 “주가가 2013년 후 최저 수준을 나타내면서 다우존스지수 퇴출설까지 나왔다”며 “뒤처진 AI 전략과 관료주의, 고착화한 기업 문화 등이 쇠락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WSJ는 “이들 업체의 파산이나 분사가 가능성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며 “기술 혁신을 위해 연구개발에 투자하기보다 당장의 이익만 좇다가 위기를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진단했다.

○흔들리는 입지…미 경제 후폭풍 막대

인텔·보잉 위기를 미국 제조업계의 쇠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전략 제조업체의 잇따른 몰락이 미국 경제에 잠재적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왔다.

미국은 중국과 군사, 외교뿐 아니라 경제와 기술력 측면에서도 경쟁을 벌이고 있다. 관세와 보조금 대응 등으로 양국 간 무역 갈등은 점차 거세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인텔·보잉 위기가 불거지자 미국이 혁신 제품 설계만 하고 제작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으로 이어졌다.

엔비디아와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등 미국 빅테크 기업의 소프트웨어와 기기에 필수적인 요소가 첨단 반도체다. 이들 업체는 첨단 반도체 제조를 대만 TSMC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 경제가 중국에 좌우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은 상시 변수이기 때문이다.

보잉도 마찬가지다. 미국 내에서 보잉을 대체할 기업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업계에선 보잉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세계 항공기 시장은 유럽 기반 에어버스나 중국 국영 항공기 제조업체 중국상용항공기가 장악할 것이란 시각이 많다.

WSJ는 “인텔이나 보잉 중 하나라도 미국에서 사라진다면 미국 경제에 미칠 파장은 막대할 것”이라며 “반도체와 항공 등 주요 산업 생태계는 미국 외 지역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면 되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