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수미 /사진=연합뉴스
故 김수미 /사진=연합뉴스
"김수미 씨 같은 유명 대배우한테도 저런 일이 발생하잖아요. 일반 근로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당해 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모릅니다."

25일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펼쳐온 한 노동계 인사는 "임금체불이 주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임금체불은 역대 최대 규모로 치솟고 있다. 사상 처음 전체 체불액이 2조원을 돌파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25일 마무리 된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도 임금체불 해결은 여야를 막론하고 1순위 관심사였다.

○체불액 올해 첫 2조원 돌파 전망...역대 최대 규모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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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별세한 배우 김수미의 마지막 무대 공연은 뮤지컬 '친정엄마'다. 14년간 꾸준히 출연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쏟았지만 마지막은 좋지 않았다. 아들인 정명호 씨는 고인이 "지난해부터 출연료를 지급받지 못했다"며 소송까지 준비했다고 전했다

주요 출연자들뿐만 아니라 스태프도 임금을 못 받았다. '친정엄마 체불임금 피해자 모임'에 따르면 미지급된 임금 규모만 4억원에 이른다. 제작사 대표는 되레 사무실을 방문한 근로자들에게 '무단침입'이라며 내용증명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계도 마찬가지다. 지난 24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3년부터 올해 8월까지 영화인 신문고를 통해 접수된 영화인 임금체불 금액은 총 117억원에 달한다. 건수로 보면 지난해 임금체불은 총 164건으로 집계돼 전년 대비 약 2배 증가했다.

국내 전체 체불액도 폭증세다. 지난해 전체 임금체불액은 1조7846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올해 그 기록이 깨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7월 말 기준 임금체불 발생액은 1조2261억원이다. 상반기(6월 말) 대비 무려 1825억원이 늘어난 수치다. 7월까지 벌써 작년 한 해의 70%에 달하는 임금체불이 발생다. 이 추세라면 올해 사상 처음으로 2조원을 넘어설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7월 말 기준으로 청산된 임금체불액은 9610억원이다. 전체 체불액의 약 78%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하지만 미청산 체불액은 여전히 2651억원에 달한다. 민생을 앞세웠던 정부도 비상이 걸렸다. 김문수 장관은 취임 직후인 9월 4일 기관장 회의를 긴급 소집해 첫 업무지시로 체불임금 엄단을 명령했다.

○반복·악성 체불해도 솜방망이..."상습·악덕 사업주 제재 강화해야"

임금체불은 근로자의 생계를 위협하는 일이다. 단순한 민사상 채권 관계로 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근로기준법은 임금체불에 관해 비교적 높은 법정형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임금체불이 형사처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 임금체불 등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실형이 선고된 비율은 13.2%(2869명)로 10명 중 1명 수준이다. 막상 처벌하는 경우에도 체불임금의 10%~20% 수준의 벌금형 부과에 그친다. 사업주들은 벌금은 납부하고 체불임금은 청산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피해 근로자들은 민사소송을 별도로 제기해야 한다. 벌금형이 되레 면죄부가 되는 셈이다.

체불 금액 일부를 청산하는 식으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사업주도 적지 않다. 지난 22일엔 일용직 근로자 임금을 주지 않고 도주 행각을 벌여 온 60대 건설업자가 근로감독관에게 검거됐다. 임금체불로 이미 6번이나 벌금형을 선고받았던 이 업자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됐지만, 이 업자가 체불 임금 일부를 청산하자 영장이 기각됐다. 임금체불이 '중대 범죄'가 아니다 보니 근로감독관들도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근로자가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체불 사업주를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인 것도 논란이다. 반의사불벌죄는 사업주가 형사처벌을 면하기 위해 빠르게 청산하는 것을 유도하는 차원에서 도입됐다. 하지만 체불의 상습, 고의성과 관계 없이 일괄 적용하다 보니 악성 사업주들이 "적은 금액이라도 빨리 받고 싶으면 형사처벌을 포기하라"며 근로자에게 합의를 종용하고 되레 성을 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고의·악덕·상습 체불사업주에 대해서는 형사 처벌을 강화하고 반의사불벌제 적용을 배제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악의적·상습적 임금체불이 아닌 경우엔 과태료 제도 등을 통해 경제적 재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죄형법정주의가 적용되는 벌금형과 달리 과태료는 위반 사항에 따라 유연하게 훨씬 많은 금액을 부과할 수 있어 청산 효과가 높기 때문이다.

한 노무사는 "정부가 노동약자 보호를 내세우고 있는데 가장 기초적인 노동법 위반 사유인 임금 체불을 잡지 못하면 공허한 얘기가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