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日 전자산업 몰락, 엔고 탓 아니다"는 前 일본은행 총재
‘세계가 일본처럼 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세계적인 화두였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걱정하고 있지만, 경기가 일찍 꺾인 유럽은 다시 디플레이션에 위협받고 있다. 중국도, 한국도 그렇다.

<일본의 30년 경험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는 그런 점에서 눈에 띄는 책이다. 책을 쓴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2008~2013년 일본 중앙은행 총재를 지냈다. 글로벌 금융위기, 동일본 대지진, 유럽 국가 부채 위기가 연이어 벌어진 때였다. 1972년 중앙은행에 들어간 그는 일본 경제의 거품과 붕괴도 목격했다. 현재 아오야마가쿠인대 특임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7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 경제 상황과 중앙은행의 대응, 그리고 그 경험들이 주는 교훈을 논한다. 박기영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와 민지연 한국은행 통화정책국 과장이 번역을 맡아 전문성을 더했다.

저자는 중앙은행가지만 통화 정책과 환율 정책만으로 경제를 살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시적으로 인공호흡기를 댈 수 있지만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산업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일본 전자산업의 몰락은 엔고 때문이 아니라 삼성전자나 LG전자에 뒤진 경쟁력 때문”이라며 “문제의 근원을 그대로 두고 금융 대책만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 누구도 이를 반박하거나 거스르기 매우 어렵게 된다”고 했다. 한국에도 교훈을 준다. 원화 가치를 낮추는 것이 당장 수출을 늘리는 데 도움은 되지만 여기에 안주하면 장기적인 경쟁력이 떨어진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 저자는 1980년대 일본 경제의 거품은 기준금리를 올리는 타이밍을 못 맞춘 데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사실 일본 중앙은행은 1989년 5월 첫 금리 인상 훨씬 전부터 금리 인상을 준비했다. 그런데 1987년 10월 블랙 먼데이 사태로 중단됐다. 1988년 1월에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총리와 만나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 일본이 낮은 금리 기조를 이어 나간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정치적 압력에 금리 인상은 또다시 무산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벤 버냉키 미국 중앙은행 의장 등이 책을 많이 썼다. 좋은 자료지만 주로 미국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한계가 있다. 이 책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반갑다. 한국이 미국보다 일본과 비슷하다는 점에서도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이 많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