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무대장치나 분장, 장면의 전환 없이 무대 위에는 오직 피아노 한 대와 한 사람 뿐.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는 리트(독일 가곡)는 텅 빈 무대를 피아노의 선율과 성악가의 목소리로만 채운다. 리트 전문 가수란 오페라 가수와는 전혀 다른 장르의 성악가다.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 리트 가수에게는 음정과 박자가 맞는 가창을 들려주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다. 리트는 시와 문학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선행된 가수만 부를 수 있기에 고독한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세계적 리트 전문 테너와 바리톤이 비슷한 시기 한국을 찾아 각기 슈베르트의 작품을 노래했다. 지난 2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는 영국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60)가, 26일에는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독일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64)가 무대에 섰다. 두 성악가 모두 유명 연가곡 '겨울나그네(Winterreise)'를 노래했다.

피아노의 역할이 극대화된 가곡

이안 보스트리지와 마티아스 괴르네가 부른 '겨울나그네' 공연은 작곡가 슈베르트(1797~1828)가 직접 감상했어도 만족할만한 특별한 공연이었다. 이날 공연을 위해 세계적인 거장 피아니스트들이 힘을 보탰기 때문이다.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랄프 고토니(78·핀란드)와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80·포르투갈)가 건반 앞에 앉아 고독한 '겨울나그네'의 선율을 작곡가의 의도대로 공연을 이끌었다.

슈베르트의 가곡은 이전의 예술가곡들과 달리 피아노가 반주부를 넘어 역할이 극대화된 것이 특징이다. 그가 18세이던 1815년에 발표한 '마왕'의 자필 악보에 말굽 소리를 표현하는 강한 3연음부를 연주할 수 있는 우수한 피아니스트가 필요하다고 직접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슈베르트는 피아노를 단순한 반주의 역할이 아닌 성악가와 동등한 위치에서 음악을 표현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성악가들이 슈베르트 가곡을 두고 '노래와 피아노의 이중주'라고 부르는 이유다.

국내 클래식 팬들에게 작곡가 진은숙의 시아버지로 친숙한 고토니는 평소 슈베르트 음반 제작에 힘써왔으며 그의 가곡과 음악에 탁월한 해석을 인정받아 오스트리아 문화부로부터 슈베르트 메달을 수상한 스페셜리스트다.
이안 보스트리지와 랄프 고토니의 '겨울나그네' / 사진. ⓒ서울국제음악제
이안 보스트리지와 랄프 고토니의 '겨울나그네' / 사진. ⓒ서울국제음악제
괴르네와 함께 무대에 오른 조앙 피레스는 은퇴 시기를 고민 중이라고 밝혔음에도 한국에서 처음으로 '겨울나그네' 피아노 연주 무대를 선보였다. 이번 공연은 80세의 피아니스트가 독주 피아노 무대에서 내려오더라도 '리트 피아니스트'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활동을 계속할 것을 기대하게 하는 무대였다.
마리아 조앙 피레스 / 사진. ⓒ성남문화재단
마리아 조앙 피레스 / 사진. ⓒ성남문화재단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와 랄프 고토니의 겨울나그네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보스트리지는 성량을 쏟아내 공간을 채우려는 가수들과 달리 600석의 챔버홀의 울림을 끌어내듯 정확한 음정의 공명만으로 맛깔스러우면서도 아픈 노래를 들려줬다.

제1곡 '안녕히(Gute Nacht)에서는 특유의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음색으로 겨울 여행을 시작했다. 제2곡 '풍향기(Die Wetterfahne)'을 노래할 때 보스트리지는 마치 사람이 아닌 악기 같았다. 강한 포르테로 노래할때는 핸드벨 같은 울림을 들려줬고 여린 피아노를 들려줄때는 잘 훈련된 클라리넷 같았다.

제3곡 '얼어붙은 눈물(Gefrone Tränen)'에서는 고토니의 해석이 객석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슈베르트가 얼음 위에 떨어지는 눈물 소리를 의도해 쓴 오른손 단음 연주는 고토니의 손에서 보다 섬세하고 날카롭게 표현돼 한 방울의 눈물이 얼음 위에 울려낸 음처럼 공간을 울렸다. 보스트리지는 감정을 잘 이어받아 쓸쓸한 정서의 연주를 이어갔다.

제5곡 '보리수 (Der Lindenbaum)'를 노래할때의 보스트리지는 안락한 듣기 편한 음색으로 시작해 성량을 과장하지 않고 노래했다. 전주가 시작되자 무대 오른편을 바라보며 먼 산을 보듯 연기해 숲을 그리워하며 노래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제6곡 '홍수(Wasserflut)'에서는 뮐러의 시에 쓰 내용처럼 많은 눈물이 홍수처럼 얼굴에 흐르는 표현의 강조가 필요할 때만큼은 빠른 속도로 관객에게 시로 쓰인 가사와 함께 음정을 꺼내주듯 노래했다.

제11곡 '봄꿈(Frühlingstraum)과 제13곡 '우편마차(Die Post)'은 정확한 독일어 딕션과 표현을 보여줬다. 70분의 보스트리지와 고토니가 들려준 겨울나그네를 듣는 내내 객석에서는 눈물을 닦아내는 관객들이 여럿 보였다. 관객과 연주자가 함께 호흡하며 흘러간 시(詩)와 음(音)의 시간이었다.
이안 보스트리지와 랄프 고토니의 겨울나그네 / 사진. ⓒ서울국제음악제
이안 보스트리지와 랄프 고토니의 겨울나그네 / 사진. ⓒ서울국제음악제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와 피아니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겨울나그네는 시작부터 노장에 대한 배려가 돋보이는 무대였다. 성악가가 먼저 입장하는 무대 관례와 달리 괴르네는 조앙 피레스를 배려하듯 먼저 무대에 입장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괴르네와 피레스 모두 안경을 쓰고 무대에 등장해 공연을 시작했다. 첫 곡인 '안녕히(Gute Nacht)'에서 악보에 쓰인 Mäßig (적당한 빠르기)보다 조금 느린 듯한 템포로 곡을 시작했다. 피레스는 무대에서 초반의 긴장감을 금세 떨쳐내고 제5곡 보리수(Der Lindenbaum)부터 대가의 기품이 느껴지는 Klavier Klang(피아노 울림)으로 무대를 가득 채웠다.

1100석의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진행된 공연은 리트 전문 바리톤 괴르네의 진가를 볼 수 있는 무대였다. 괴르네는 리트 분야에서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계보를 잇는 독일의 바리톤이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알프레드 브렌델뿐만 아니라 한국의 조성진과도 독일 가곡 음반을 제작 발표해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성악가기도 하다. 리트 무대에서 상대적으로 경험이 많은 괴르네는 선배 음악가 피레스를 배려하듯 노래를 이어갔다. 객석을 보며 노래하다가 피아노 건반 앞에 앉은 마리아 조앙 피레스와 호흡하기 위해 몸을 돌려 소리를 들려주듯 노래했다.

이날 공연에서 건반 앞에 앉은 조앙 피레스가 17번 곡 '마을에서(Im Dorfe)부터 마지막 24번째 곡 '거리의 악사 (Der Leiermann)까지 적극적인 연주로 괴르네의 낭독에 개입한 것은 신선했다. 일반적인 리트 무대에서 피아노는 페달을 많이 쓰지 않고 가수들과 볼륨을 맞춰가며 연주를 함께하지만, 피아노라는 악기의 음량조절에 정통한 피레스는 깊이 있는 울림을 만들기 위한 과감하고 적극적인 페달링으로 시원한 볼륨을 들려줬다. 피레스의 연주로 듣는 겨울나그네의 전주와 후주는 관객의 귀를 즐겁게 하는 포인트였다. 피레스와 괴르네의 '겨울나그네'는 둘의 새로운 콜라보 무대를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마티아스 괴르네와 마리아 조앙 피레스 '겨울나그네' / 사진. ⓒ성남문화재단
마티아스 괴르네와 마리아 조앙 피레스 '겨울나그네' / 사진. ⓒ성남문화재단
두 공연의 현장을 찾은 관객들은 이들이 선사한 리더아벤트(독일가곡의 밤)에 만족했지만 두 공연 모두 관객의 매너 없는 행동이 있었다.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가 노래한 12번 '고독(Einsamkeit)가 끝이 나기 직전 바닥에 휴대폰을 떨어뜨린 관객의 실수로 객석에서 발생한 둔탁한 소음에 연주자들의 집중이 흐트러지며 13번 '우편마차(Die Post)의 시작 부분의 가사를 제목인 'Die post'로 바꿔 부르는 실수했다.

괴르네는 다음 가사를 재빨리 기억해내 노래를 이어가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이안 보스트리지의 무대에서는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을 위해 조용히 집중하는 성악가와 달리 객석의 관객들이 곡마다 과한 기침을 해댔다. 보스트리지도 잠시 청중들의 기침 소리를 의식하는 듯했으나 실수 없이 24곡을 모두 불렀다.

무대 위에서 70분 동안 실연당한 청년의 마음으로 겨울 여행을 다녀온 테너가 눈을 지그 감고 남은 감정을 정리하던 순간, 마치 "작품이 끝났으니 눈을 뜨세요"라고 알려주듯 큰 박수를 쳐낸 한 관객의 박수는 보스트리지가 읊어낸 시와 고토니가 들려준 음에 집중해 함께 호흡한 청중들에게도 결례였다.
이안보스트리지와 랄프 고토니의 겨울나그네 커튼콜 / 사진. ⓒ서울국제음악제
이안보스트리지와 랄프 고토니의 겨울나그네 커튼콜 / 사진. ⓒ서울국제음악제
마티아스 괴르네와 조앙 피레스의 '겨울나그네' / 사진. ⓒ성남문화재단
마티아스 괴르네와 조앙 피레스의 '겨울나그네' / 사진. ⓒ성남문화재단
슈베르트 자신의 고독함을 악상에 써낸 겨울나그네

겨울나그네는 독일의 시인 빌헬름 뮐러(1794~1827)의 시에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슈베르트가 음악을 쓴 24곡의 연가곡이다. 겨울나그네의 음악은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적막하고 고독하다. 겨울나그네가 완성된 1827년은 슈베르트의 정신과 신체가 약했던 시기다. 존경하던 선배 작곡가 베토벤과 자신을 위해 시를 써준 뮐러가 1827년 사망했다. 겨울나그네는 슈베르트 자신이 슬픈 정서와 고독함을 느끼던 상황에서 완성한 작품이다.

슈베르트는 겨울나그네를 발표한 이듬해인 1828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첫 곡 '안녕히(Gute Nacht)'를 시작으로 실연당한 청년의 겨울 여행을 시와 음악으로 그려낸 연가곡 '겨울나그네'는 작품을 통틀어 단 두 곡만을 제외하고 모두 단조로 쓰였다. 제5곡 '보리수(Der Lindenbaum)'와 제11 곡 '봄꿈(Frühlingstraum)' 단 두 곡만 장조(메이저 화성)로 쓰여 전반부와 후반부 중 잠깐의 희망을 나타내듯 연주된다.

조동균 기자